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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고대 로마 이야기 #.3-10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와 폭군 카라칼라

[로마] 고대 로마 이야기 #.3-10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와 폭군 카라칼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죽은 후 , 혼란해진 정세를 평정하고 황제에 오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5현제 시대가 끝나고 코모두스에 의해 파탄에 이른 경제를 회복하고 군제를 개편하여 로마의 재부흥에 힘썻던 그의 행보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고, 그의 뒤를 이어 황제에 오른 그의 아들인 카라칼라에 대해서도 잠시 알아보도록 하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146년 현재의 리비아 지역에서 태어난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기사계급으로 태어났다. 164년 18세가 되던 해, 당시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만나게 되는데, 세베루스가 마음에 든 아우렐리우스는 그가 25세가 되던 해부터 회계 감사관, 호민관을 거쳐 법무관에 선출되기까지 큰 도움을 준다. 아우렐리우스의 도움으로 경험을 쌓은 세베루스는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시칠리아 등의 총독으로 부임했다가, 180년 아우렐리우스가 죽고, 그의 아들 코모두스가 황제에 오르자 세베루스는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그의 출세길은 잠시 멈추게 되었다. 코모두스가 아버지의 총애를 받은 그를 시기한 것일수도 있겠다. 이에 세베루스는 아테네로 유학을 떠나 철학을 공부한다. 하지만 곧 코모두스의 요청으로 191년 로마로 돌아와 가까운 파논니아 총독으로 임명된다.

 

 

그러다 192년 코모두스가 과도한 폭정으로 인해 암살당한다. 코모두스 사후 원로원의 추대로 페르티낙스가 황제에 오르게 되는데, 페르티낙스는 게르만족을 상대로 큰 전공을 세웠던 명성 높은 장군이었고, 그는 불필요한 경비를 줄이고, 코모두스 때 누명을 쓴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주는 등 나쁘지 않은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페르티낙스가 황제에 오르는데 있어 큰 공을 세웠던 근위대장 레토가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 없자 그에게 불만을 품게 되었고, 근위대를 설득해 페르티낙스를 살해한 후 새로운 황제로 원로원 의원이자 갈리아, 북아프리카, 소아시아, 달마티아, 라인강 속주 총득을 역임했던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를 추대한다. 하지만 율리아누스가 황제에 오르자, 네로가 살해당했을 때와 비슷하게 로마의 정세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내란이 시작된 것이다. 시리아 총독으로 있던 니게르, 브리타니아의 총독으로 있던 알비누스, 판노니아의 총독인 세베루스가 각 군단의 지지를 받아 황제를 자청한 것이다. 이런 일은 193년, 단 1년만에 발생한 것이었다.

 

 

세베루스는 군단의 지지를 받아 스스로 황제가 되었고, 갈리아에 있던 알비누스와 공동황제로 취임하자는 조건의 동맹을 맺고 12개 군단 중 2개 군단을 출정시켜 율리아누스를 공격했다. 율리아누스는 어떻게든 막아보려 했지만, 결국 근위대의 배반으로 인해 암살당하고 만다. 마침내 로마에 입성한 세베루스는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이후 로마군의 핵심이었던 기존의 근위대를 해산하고, 자신의 병사들로 교체했다. 로마에 입성하여 원로원에게 황제로 인정받은 세베루스는 니게르를 공격하기 위해 동쪽으로 이동했다. 193년 말, 8개 군단 4만 8천 군사를 이끄는 니게르와 비잔티움 근처 페린투스에서 전투를 해 패배했다. 하지만 194년 니카이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니카이아 전투에서 패배한 니게르 군은 스스로 분열하였고, 소아시아 지역이 세베루스의 휘하로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그해 10월 이수스 평원에서 세번째 전투를 했고, 여기서도 세베루스가 대승을 거두게 된다. 전투에서 패배하여 파르티아로 도망치던 니게르를 쫒아 유프라테스 강 근처에서 그를 사살한다. 이후 197년에는 리옹 근처 평원에서 벌어진 알비누스와의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세베루스는 단독황제에 오른다.

 

 

그는 황제에 오르자마자 자신이 아닌 알비누스를 지지하던 원로들을 처형하거나 무시했다. 반면 자신을 지지하던 병사들과 시민들, 원로들은 극진히 우대했다. 그러면서도 군단의 수를 늘리고, 병사들의 임금을 인상했다. 이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세베루스는 이전과는 다르게 군사력에 기반을 둔 정치를 행했다. 하지만 병사들의 임금이 늘어나자, 벼사들은 제대하지 않으려 했고, 나중에는 국가 재정에 큰 위협을 맞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군대가 강력해지자 원로원의 힘이 약해지기 시작한다.

 

 

세베루스는 법을 개혁하기 위해 당시 저명한 법학자였던 울피아누스, 파울루스, 파피니아누스 등을 등용하여 사법개혁을 단행했다. 그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은 원로원이 관할해왔던 로마의 법정을 황실 근위대장의 관할로 바꾼 것이었다. 그리고 로마 제국의 마지막 가도 건설사업이었던 시베리아나 가도 건설 사업을 완료했고, 포로로마노의 마지막 건축물이자 자신의 공적을 칭송하는 세베루스 개선문을 건설하였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

 

 

199년 세베루스는 파르티아를 정복하기 위해 동방원정을 떠나는데, 페르시아에 의해 힘이 약해진 파르티아를 격파하고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의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속주로 복속시키는데 성공한다. 이어 205년 근위대장이었던 플라우티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하지만, 권력욕이 넘쳤던 큰 아들 카라칼라가 그를 죽인다. 209년에는 두 아들 카라칼라와 게타를 데리고 브리타니아를 정복하러 떠나는데, 이 원정 중이었던 211년 세베루스는 에부라쿰에서 카라칼라와 게타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숨을 거두게 된다.

 

 

후계자로 지명된 두 아들은 성향이 전혀 달랐는데, 큰 아들이었던 카라칼라는 권력욕이 강하고, 굉장히 호전적인 성격이었고, 반대로 동생인 게타는 온화한 성격이었다. 카라칼라는 동생과 권력을 나누기 싫었고 결국 212년 어머니의 앞에서 자신의 동생 게타를 칼로 찔러 살해하고 단독 황제에 오르게 된다.

 

 

카라칼라

 

 

단독 황제에 오른 카라칼라는 여러가지 포악한 일을 일삼았다. 게타의 지지자였다는 이유로 약 2만명을 학살했는데, 그와 서신을 주고 받았거나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는 이유였다. 215년 파르티나 원정을 떠났으나 당시 파르티아의 왕이었던 볼로가세스 5세가 자신의 요구를 선뜻 들어줌으로써 명분을 잃고 중단되었고, 이후 알렉산드리아에 머물던 중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는 수천명의 알렉산드리아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로마의 일반 시민들에게는 굉장히 무서운 존재로 각인된 황제였으나, 병사들에게는 인기가 많았다. 213년 게르마니아 방벽을 완성했고, 병사들의 임금을 인상하고 하사금을 내리는 등 대우를 후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국고는 비어갔고, 이때 그가 내린 조치가 바로 안토니우스 칙령이다. 내용은 로마제국 국경 안에 거주하는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시민권을 주어 로마인 뿐만 아니라 속주민들도 로마 시민으로써의 권리를 주고 의무를 함께 하도록 한 것이다. 겉으로 보면 좋은 내용인 듯한 이 칙령은 현재 그다지 좋지 못한 평가를 받고 있다. 이유는 속주민들에게 허울뿐인 시민의 권리를 주었을 뿐, 약탈과 학정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유명무실한 시민권을 주고, 의무를 다하게 한다는 것은 세금을 내라는 것과 같고, 결국 속주민들을 통해 세금을 더 확보하고자 했던 정책의 일환이었던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216년 파르티아의 볼로가세스 5세가 아르타바누스에게 살해되자, 다시금 군사를 이끌고 파르티아로 향했다. 하지만 파르티아와 전투 중에 외교적인 정책으로 파르티아를 복속시키겠다는 생각으로 급변하여 그 중 파르티아의 공주에게 청혼한다. 하지만 당시 정황 상 로마군이 파르티아 군에게 고전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청혼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고전에 고전을 거듭하다 메소포타미아의 북부 도시인 에데사에서 겨울을 보내고, 봄이 되어 다시 출정에 나서는데, 이 원정길에서 암살당하게 된다. 파르티아를 정복하기 위해 길을 가던 중, 태양신을 모셔놓은 신전에 들어가기 위해 잠시 말에서 내린 사이 기병부대 장교였던 마르티알루스와 호위병들이 그를 칼로 찔러 살해했다. 그 때 카라칼라의 나이 29세가 되던 해였다.

 

 

카라칼라 욕장

 

카라칼라는 자신의 이름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유명한 건축물들을 남겼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카라칼라 욕장이다. 212년 착공해 216년에 완공된 이 목욕탕은 동시에 1600명을 수용할 수 있었고, 그 안에는 열탕, 미온탕, 냉탕, 도서관, 갤러리, 야외 트랙 등 없는게 없을 정도의 규모에 건물의 내부에는 모자이크, 대리석, 거대한 조각 등으로 장식되어 호화스러움의 극치를 보여줬다고 한다.

 

 

어쨋든 카라칼라가 죽고 난 다음에도 계속해서 새로운 황제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우리에게 가장 크게 알려진 사람들이 지금까지 설명해왔던 황제들이다. 황제들이 너무너무 많기 때문에 전부를 설명할 순 없지만, 관심이 있다면 그에 관한 기록들을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자~! 드디어 끝이 보이는 것 같다. 지금부터는 황제들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로마의 동,서 분열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