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고대 로마 이야기 #.3-9 현명했던 마지막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121년에 태어나 3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에게 입양되었다. 어릴때부터 능력이 영특했던 아우렐리우스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눈에 띄어, 136년 하드리아누스의 양자이자 첫번째 후계자인 루키우스 케이오니쿠스 코모두스의 딸인 케이오니아 아파비아와 약혼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었던 아우렐리우스가 정계 전면에 나서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138년 코모두스가 폐병으로 사망하게 되고, 이어 하드리아누스는 안토니누스를 두번째 후계자로 삼는다. 하드리아누스는 안토니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하면서 전부터 눈여겨 보았던 아우렐리우스와 죽은 코모두스의 아들 루키우스 베루스를 양자로 입적하라 명령해 안토니누스는 그에 따라 둘을 양자로 삼는다. 이후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죽음을 맞이했고, 안토니누스가 황제에 오른다. 황제에 오른 그는 안토니누스 피우스로 불리게 된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아우렐리우스의 약혼을 파기하고, 자신의 딸인 피우스티나와 약혼, 결혼시켰다.
루키우스 베루스
아우렐리우스는 161년 루키우스 베루스와 함께 공동으로 집정관에 올라,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죽자, 둘이 함께 황제의 자리를 계승했다. 이때부터 여러가지 큰 일들이 닥치기 시작하는데, 이탈리아와 그 주변 일대에 큰 홍수가 일어났고, 파르티아가 로마 동방에 침입하여 1개 군단이 궤멸당했으며, 아르메니아 왕국까지 점령당했다. 지켜볼수만 없었던 두 황제는 스타티우스 프리스쿠스를 카파도키아 총독에 임명하면서 루키우스 베루스가 출정해 163년 파르티아군을 격파했고, 아르메니아 왕국의 수도를 탈환했으며, 165년에는 파르티아 안쪽까지 진격해 완벽하게 진압해냈다. 한편 168년에는 북방의 게르만족과 전쟁을 치르는데, 이 전쟁에서 루키우스 베루스가 사망하게 된다. 베루스의 사망 이후, 아우렐리우스의 단독통치가 이루어지는데, 170년 아우렐리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다키아 속주부터 점차 북진하여 게르만족을 패주시켰다. 뒤이어 아프리카 속주에서 마우리타니아 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히스파냐까지 쳐들어오게 되는데, 이에 동생인 피디우스 빅토리우스를 파견해 이마저 진압해냈다. 172년부터 게르만족과 본격적인 게르마니아 전쟁이 발생하는데, 서로 밀고 밀리며 전쟁을 계속하다 172년에 결국 게르만족과 로마 사이에 강화조약이 성립하면서 마무리된다. 아우렐리우스는 270년만에 뚫려버린 북부 방어선과 잦은 외세의 침략 등 일련의 사건으로 4개 군단을 추가적으로 창설하기도 했다. 178년에는 2차 게르마니아 전쟁이 발발하는데, 당시 집정관이었던 율리우스 베루스가 전사했음에도 불구하고, 게르만족을 압도하며 대승을 거두었다.
이러한 수많은 일들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변방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는 큰 반란이 없었다는 것은 그가 내정에도 신경을 쏟았으며 성과를 거두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다. 아우렐리우스는 황제로 즉위한 후, 지금까지 본 바와 같이 수많은 반란과 전쟁이 일어났지만 이를 모두 수습해낸 것만 봐도 충분히 오현제의 한명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후계자를 지정함에 있어 오점을 남기게 된다. 177년 아우렐리우스는 네르바 이후부터 능력있는 자를 양자로 입적시켜 그에게 화제의 자리를 넘겨주는 일련의 암묵적인 관행을 깨고 자신의 친아들인 코모두스를 후계자로 지명하는데, 이후 코모두스는 칼리굴라, 네로에 버금가는 폭정을 행사하다 결국 암살되고, 안토니우스 왕조가 종말을 맞이함과 동시에 군인 황제 시대로 들어가게 된다.
수많은 전쟁을 치렀다고 해서 그가 폭력적이고 호전적인 황제였을까? 그건 아니었다고 본다. 아우렐리우스는 인정이 많고 자비로워 백성을 널리 사랑했다고 한다. 그러니 당시 사람들이 오현제라 부르며 그를 칭송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기독교의 입장에선 그것이 아닐수도 있다. 아우렐리우스는 당시 다른 황제들과 마찬가지로 유일신을 믿으면서, 그 신이 황제보다 강한 힘을 가졌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황제의 정책에 항명하거나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다보니 기독교를 탄압하게 된다. 탄압의 이유가 단지 기독교를 싫어했다거나 증오했다기보다는 자신의 국가운영정책을 좀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펼쳐내기 위한 정책상의 한 부분으로 사용했을 뿐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탄압으로 인해 그가 죽은 후, 아우렐리우스는 기독교인들에게 수난을 당하게 된다. 현재 로마 콜로나 광장에 세워져 있는 아우렐리우스의 전공을 조각으로 만든 '아우렐리우스 전승탑'을 교황의 명령에 의해 기독교인들이 탑의 꼭대기에 세워져 있던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동상을 철거해버리고 사도 바울의 동상을 세워놓기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로마에 있던 수많은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동상은 대부분 철거되었고, 현재는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만큼만이 남아있다. 당시 기독교인들이 아우렐리우스 황제를 얼마나 싫어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믿음을 더 강하게 하기 위한 기독교의 정책 중 한부분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다른 면에서 살펴보면 아우렐리우스는 로마의 황제이기도 했지만 스토아학파를 대표하는 철학자이기도 했다. 그의 스승인 에픽테토스와 세네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스토아학파의 대표주자로 금욕과 절제를 주장하고, 자신의 사색과 철학에 관한 내용을 '명상록'이라는 에세이집에 남겨놓았다. 이 저서를 읽어보면 그가 가졌던 철학적인 사상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 시간에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카라칼라에 대해 이야기 해보도록 하자. 이 두사람만 마무리하고나면 황제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하도록 하고, 로마의 분열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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