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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고대 로마 이야기 #.3-8 위대한 하지만 쓸쓸했던 황제, 하드리아누스

[로마] 고대 로마 이야기 #.3-8 위대한 하지만 쓸쓸했던 황제, 하드리아누스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이아누스와 같은 스페인 출신으로 로마 역사상 최대 영토를 가지게 된 로마 제국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정복보다는 내정과 방위에 힘썼던 황제다. 지금부터 그에 대해 간단하게 알아보도록 하자.

 

 

76년 태어난 하드리아누스는 85년 먼 친척뻘이었던 트라이아누스 황제가 그의 후견인이 되어 스페인 이탈리카 지역에서 로마로 거주지를 옮긴다. 18살의 나이에 로마 제국 2군단의 부관에 임명되면서 지휘관으로써의 발판을 마련했고, 96년에 제 5마케도니아 군단 지휘관, 97년 제 12프리미게니아 군단 지휘관으로 임명되면서 여러 공적을 세운다. 101년에는 황제의 측근에 발탁되어 개인 재무관을 지냈고, 105년에는 법무관, 제 1미네르바 군단의 사절을 역임했다. 108년에는 로마 제국 제 2의 권력인 보좌 집정관에 선출되기도 했다.

 

 

하드리아누스

 

 

117년 트라이아누스 황제에게는 자리를 물려줄 아들이 없었고, 동방의 전투에서 로마로 복귀하던 중 병으로 사망하게 되는데, 임종에 하드리아누스를 양자로 삼고, 그를 후계자로 임명하여 하드리아누스가 항제로 등극하게 된다. 그는 주요 요직을 두루 경험했지만, 제위를 계승할만한 인물로는 매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의 즉위는 주변에서 큰 환영을 받지는 못했다.

 

 

하드리아누스가 로마 제국의 황제에 올랐을 때는 로마의 영토가 최대로 확장된 상태였다. 그는 트라이아누스와는 달리 정복전쟁이 아니라 반란의 불씨가 남아있는 동방의 속주들을 포기하고 지금 있는 로마제국의 영토의 방위와 정비에 힘을 쏟았다. 변경의 방비를 튼튼히 하기 위해 브리타니아 북부에 길이 120km에 이르는 '하드리아누스 방벽'을 건설하였고, 라인강, 도나우 강 상류를 강화하기 위해 550km에 달하는 '게르마니아 방벽'을 건설하였으며, 어릴때부터 전장에서 생활했던 하드리아누스는 군대의 규율을 개정하여 군 내부를 개혁하기도 했고, 용병술에 능해 전투상황에서는 가장 앞에 서서 군사들을 직접 지휘하여 군대의 사기를 크게 높이기도 했다. 이렇듯 하드리아누스는 군사적인 측면에서 우수한 업적들을 남겼다. 다른 한편으로는 비밀경찰을 조직하여 그의 경쟁자들을 사찰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재위 기간 21년간 총 3차례에 걸쳐 로마 제국 전역 곳곳을 직접 시찰하여 각지에서 일어나는 반란에 대한 대처, 통치 기구의 정비 등 제국 내부를 튼튼하게 하는데 충실하게 노력하여 제국의 통치 체제를 재구축하였다. 특히 통치기구 정비를 철저히 하여 그가 구축한 관료 기구들은 후세에도 전해지게 된다. 넓어질대로 넓어진 제국의 영토를 효과적으로 통치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정책들로 로마 제국의 영토는 하드리아누스에 의해 더욱 단단하게 굳어진다.

 

 

하드리아누스 방벽

 

학문과 예술적인 측면에서도 크게 발전하는데,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어릴적 스승이었던 도미트리우누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도미트리우누스는 그리스 시와 문학, 음악, 예술, 철학 등 다방면에 뛰어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영향을 미쳐 그리스 양식을 선망하게 되었고, 그리스 양식의 예술 작품들이 많이 탄생하게 된다. 당시 하드리아누스는 그리스어를 공부하여 그리스어가 아니면 말을 하지 않겠다고 하기도 했고, 그리스의 문화, 예술, 정치 등을 공부하여 여러분야에 두각을 나타냈을 뿐만 아니라, 특히 그리스 문학에 대해서는 상당한 실력자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러다 132년 그는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가 황제였던 시절, 피괴된 성지였던 예루살렘을 재건하여 식민 도시로 삼고자 했는데, 이 일로 유대인들의 반란을 초래하여 4년간 반란 진압에 나서게 된다. 이 기간동안 사망한 유대인이 약 85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 반란을 진압하면서, 카톨릭에서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황제 중 한명이 된다.

 

 

하드리아누스는 말년에 병에 걸리는데, 코피를 쏟거나 피를 토하는 등 출혈이 잦았다고 한다. 그런 중에 병이 더 깊어지게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평소 남색을 즐겼는데, 그런 그가 가장 사랑하던 소년 안티노우스가 어떠한 사건(나일강에서 배를 타다 익사했다는 이야기가 있다.)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했고, 이 일로 큰 충격에 빠져 남은 생을 불행하게 보냈다고 한다. 이후 안티노우스를 위해 그를 신격화하고 안티노우스의 동상을 세우기도 했는데, 주변 사람들은 그런 황제를 비웃었다고 한다. 큰 충격을 받은 그의 병은 더 깊어지게 되었고, 자신의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직감했는지, 자신이 묻힐 원형 묘지를 건설한다. 그것이 현재 로마에 위치하고 있는 카스텔 산탄젤로, 바로 천사의 성이다.

 

 

죽기전 하드리아누스는 자신의 후계자로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를 지명했으나, 폐병으로 급사를 하게 되었고, 다시 한번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하드리아누스는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후계자로 지명하면서 어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양자로 삼게 하였다. 그러면서 하드리아누스는 죽기 전, 안티노우스의 영혼을 다시 한번 만나고 싶어 바이아이의 해안가로 여행을 떠났는데, 그 곳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는 말년에 병으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받았는데, 그 때마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 따라주지 않았고, 결국 죽지못해 죽을만큼 큰 고통 속에서 나머지 삶을 살다 서기 138년, 62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게 되었다. 황제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쓸쓸한 말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쨋든 선대 황제 트라이아누스가 만들어놓은 로마 제국의 최전성기를 더 탄탄하게, 더 단단하게 만든 이 황제는 '로마 제국의 오현제'라고 불릴만한 업적을 남긴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의 삶을 살펴보면 황제라는 사람도 결국 그저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사람일뿐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권력을 가지든, 명예를 가지든, 재력을 가지든 결국 죽음에 이르는 한 사람일 뿐인 것을...

 

 

다음 시간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