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고대 로마 이야기 #.3-7 오현제의 시대를 연 네르바, 그리고 로마의 최전성기를 이끈 트라이아누스
네르바는 도미티아누스의 암살 이후 원로원의 추대로 굉장히 많은 나이에 새 황제로 등극하게 되는데, 그로부터 로마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트라이아누스, 하드리아누스, 피우스, 아우렐리우스로 이어지는 새로운 왕조, 안토니우스 왕조가 열리게 되었다.(루키우스 베루스, 코모두스도 있지만 오현제로 불리진 않는다.)
네르바
서기 30년 태어난 네르바는 원래 법학자로 활동했던 사람이었다. 이후 71년과 90년에는 집정관을 지냈고,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절에는 황제의 남색 상대 중 한명이었다. 하지만 96년 폭정으로 인해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당하게 되고, 원로원의 추대로 황제에 오르게 되었다. 30년에 태어나 96년에 황제에 올랐으나, 당시 나이 66세였다. 노령에 황제에 올라 도미티아누스의 폭정을 수습하기 위해 힘을 쏟았다. 그 대표적인 내용은 자녀가 많은 시민에게 토지를 나눠주었고, 부유한 집의 자녀교육을 위해 국가기관을 설치하였으며, 우편 제도의 비용을 국가가 부담하게 하였고, 로마시의 곡물 분배제를 실시하고, 낡은 수도시설을 정비하여 민생을 안정시켰다. 다른 한편으로는 원로원과의 관계를 더 돈독하게 하기 위해 많은 안건들에 대해 원로들의 의견을 듣고 수정하기도 하였다. 네르바는 군대의 지휘 경험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군부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보완이 필요함을 느꼇고, 당시 게르마니아 총독으로 군대의 신임이 두터웠던 트라이아누스를 양자로 삼아 그를 후계자로 지명하여, 군에 관련된 전권을 위임하였다. 네르바는 66세라는 많은 나이에 황제에 올라 단 2년동안 재위했는데, 누가 봐도 대단한 업적을 남긴 것은 아니다. 하지만 네르바가 죽은 이후, 이어지게 되는 로마제국의 최전성기의 문을 열었다는데 큰 의미가 있을 수 있겠다. 네르바 이후부터 혈연관계에 의해 이어지는 세습관계가 깨지고, 유능한 사람을 양자로 들여 그 사람에게 항위를 양위하는 제도가 생겨났다. 이렇게 만들어진 황조가 바로 네르바로부터 코모두스까지 이어지는 안토니우스 왕조다.
트라이아누스
네르바가 죽은 후, 서기 98년 그의 양자인 트라이아누스가 황제로 즉위한다. 그는 히스파냐 출신으로 여러 관직을 두루 경험하였고, 97년 네르바의 양자로 지명될 때 게르마니아의 총독으로 있었다. 다른 능력도 뛰어났지만 특히 군인으로써, 장군으로써의 능력이 탁월한 사람이었다. 이런 그의 성향이 영향을 미쳤는지 그는 황제에 오른 후, 군사 원정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다. 그가 황제로 재위할 당시, 로마 제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황보하게 되는데, 북쪽으로는 역사상 완벽히 정복한 적 없었던 브리타니아 지방(현재 잉글랜드 지방), 서쪽으로는 이베리아 반도(현재의 스페인), 동쪽으로는 다키아 지방(현재의 동유럽 일부)을 포함하여 일시적으로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앗시리아까지 정복했다. 남쪽으로는 북아프리카의 지중해 연안에서부터 이집트 남부까지 정복하여 진정한 로마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끌어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바닥난 재정을 정복전쟁으로 확보한 속주들로부터 받은 세금으로 회복하였다. 아니 회복이라기보다 더 풍요롭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겠다. 다키아 지방을 정복했을 때의 이야기들은 현재 로마에 있는 트라이아누스 전승탑에 새겨져 있어 직접 확인해 볼 수도 있다.
트라이아누스 전승탑
이렇게 확보한 재정으로 내정에도 신경을 쓰는데, 네르바가 했던 것과 같이 황제 단독으로 어떤 일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원로원과의 협조를 중시하였다. 일련의 과정을 거쳐 빈곤한 사람을 구제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고, 세금 부담을 경감시켰으며, 공공사업들을 많이 진행했다. 이 뿐만 아니라 넓어진 제국의 영토를 모두 컨트롤 하기 위해 전국 각지로 뻗어나가는 도로들을 확대, 정비하였고, 수많은 행정개혁들을 실시하여 제국의 번영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 로마제국의 영토가 넓어지고 인구가 늘어나다보니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공회장인 포로로마노가 좁아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기존의 포로로마노 건너편에 새로운 광장을 축조하고, 현재의 백화점과 같은 공설 시장을 세워 시민들을 입주시키기도 했다. 트라이아누스 황제가 있던 시절을 살았던 로마인들은 신분과 빈부의 차이를 뛰어넘어, 어느 한부분도 어려움없이 평화롭게 살았다고 한다.
이렇듯 내정과 원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낸 그는 공로를 인정받아 원로원과 시민들로부터 '지고의 황제'라는 의미의 'Optimus Princeps'라는 칭호를 얻었다. 약 20년 간의 기간동안 재위한 그는 로마의 최전성기를 이끌다 동방에서의 전투를 끝내고 귀환 도중에 병으로 사망했다. 하지만 사망 전 그는 아들이 없었게 때문에 같은 히스파냐 출신인 하드리아누스를 양자로 입적시키고 후계자로 지명하여 자신의 뒤를 잇게 하였다.
그리 길게 쓰지는 않았지만 네르바의 경우는 로마 최대 전성기의 문을 열었던 황제로써 큰 의미가 있는 인물이고, 트라이아누스는 모든 면에서 진정한 로마의 최대 전성기를 만들어내고 이끌었던 인물이라는데 큰 의미가 있는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어떻게 생각해보자면 트라이아누스와 다음에 이야기해 볼 하드리아누스까지 이어지는 이 시기는 우리나라 역사 속의 광개토 대왕, 장수왕이 재위하던 고구려와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면이 없잖아 있다.
어쨋든 다음 포스팅에서는 또 다른 오현제 하드리아누스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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