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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고대 로마 이야기 #.3-6 군웅할거시대를 평정한 새로운 혈통의 황제, 베스파시아누스

[로마] 고대 로마 이야기 #.3-6 군웅할거시대를 평정한 새로운 혈통의 황제, 베스파시아누스

 

 

베스파시아누스는 태어날 때부터 거창한 신분의 인물이 아니었다. 차근차근 바닥부터 한단계 한단계 밟아 네로가 죽은 후,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에 의해 혼란한 로마를 수습할 인물로 선택되어 로마의 황제에까지 즉위하게 되는 인물이다. 지금부터 당시 로마의 혼란했던 정세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베스파시아누스

 

 

베스파시아누스는 세리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게 되는데, 신분상 로마제국 권력층 최상부에 오르기는 어려웠다. 자신의 형을 따라 공직에 입문해 36년에 트라키아 지방에서 군복무를 하고, 감사관으로 선출되어 크레타섬과 키레네에서 근무한다. 이후 39년에는 조영관, 40년에는 법무관에 선출된다. 41년 클라우디우스가 황제에 즉위했을 때, 클라우디우스의 가신인 나르키소스의 천거로 게르마니아에 있는 제2 아우구스타 군단의 군단장에 임명된다. 그로부터 2년후 43년에는 브리타니아가 로마를 침공하는데, 이를 막는데 큰 전공을 세운다. 그렇지만 베스파시아누스가 본격적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하는 시기는 네로 황제 때로 뛰어난 장군의 기질을 갖추고 있었고, 그 능력이 증명된 그는 로마 내에서 일어난 각종 반란을 진압하는데 수많은 전공을 세운다. 하지만 네로 황제가 베푸는 연회에 참석했다가 네로가 시를 읊을 때, 시를 들으며 졸았다는 이유로 유배를 당하게 되는데, 베스파시아누스는 워낙 사치스럽거나 권력을 뽐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었고, 권력에 대한 강력한 야망이 있다거나 하진 않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유배지에서 조용히 양봉을 하며 지내게 된다. 이런 그의 성격은 황제가 된 후에도 지속되어 검소하게 생활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2년 후인 66년 유대지역에서 유대인들의 독립전쟁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 전쟁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되면서 이를 평정하기 위해 네로 황제의 부름을 받고 다시금 지휘관의 신분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네로가 유배중인 그를 다시 불러올린 이유는 그가 가진 장군으로써의 능력이 첫번째, 그의 계급이 원로원 계급이 아니라는 것이 두번째였다. 유대지역의 반란을 진압한다고 해도 계급상 자신의 권력에 도전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름을 받은 베스파시아누스는 곧장 유대지역으로 이동하여 탁월한 지략으로 유대 북부지역인 갈릴래아를 점령한다. 이후 유대인들과의 협상을 통해 절충안을 제시하며 서로 공존을 모색하여, 대부분의 유대 지역을 무리 없이 통치할 수 있게 된다.

 

 

이후 68년 히스파니아 지역의 총독이었던 갈바의 반란으로 네로가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베스파시아누스는 갈바의 황제 즉위를 인정하고 축하사절로 아들인 티투스를 파견한다. 갈바는 계급상에서도 원로원 계급 출신이라 베스파시아누스로써는 대적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들 티투스가 그리스의 코린트 지방을 지날 때쯤인 69년, 갈바가 살해당하고 베스파시아누스와 같은 기사 계급 출신의 오토가 황제로 즉위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 시기에 이를 때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게르마니아 군단에 의해 새로운 황제 후보로 추대된 비텔리우스가 군사를 일으킨다. 로마에 군웅할거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비텔리우스는 황제에 오른 오토를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고 로마의 새로운 황제가 되었다. 갈바의 황제 즉위를 축하하려는 사절로 가던 티투스는 발길을 돌려 다시 되돌아와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이 일을 전한다. 이를 들은 베스파시아누스도 상황을 가만히 볼 수 없다며 군사를 일으킨다. 이집트의 2개 군단이 베스파시아누스를 새 황제 후보로 추대했고, 시리아와 유대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군단들이 그에 동의했다. 그 후에도 현재의 발칸지방에 위치하고 있던 군단들까지도 그에 동의하고 베스파시아누스의 뒤를 따랐다. 아들인 티투스에게 유대 반란의 뒤처리를 맡기고 베스파시아누스는 군대를 대동하고 로마로 진격한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자신의 동료였던 무키아누스에게 로마로 곧바로 진격하게 하는 한편, 자신은 로마의 주요 곡물 보급지였던 알렉산드리아로 향해 로마의 곡물 보급을 중단시켰다. 그리고 나중에 로마로 입성하게 된다.

 

 

이 와중에 또 다시 도나우에 있던 군단의 지휘관인 안토니우스 프리무스가 로마로 진격하여 비텔리우스의 군대를 격파한 후, 비텔리우스를 살해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무키아누스가 로마에 입성하여 안토니우스 프리무스의 권력 장악에 제동을 걸었고, 곧 이어 70년, 베스파시아누스가 로마에 당도하게 된다. 베스파시아누스가 로마로 돌아오기 직전인 69년 원로원은 군웅할거시대의 각종 반란 뿐만 아니라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고 돌아온 베스파시아누스를 새로운 황제로 인정하고 즉위를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네로를 마지막으로 카이사르의 핏줄이 끊어지고 또 다른 혈통의 인물이 황제에 오른 것이다.

 

 

이렇게 수많은 이야기를 남기며 황제에 오른 베스파시아누스는 가장 먼저 네로가 파탄내버린 로마의 재정과 불 탄 로마를 회복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황실의 토지를 투기꾼을에게 팔아 자금을 확보했고, 세금을 네로 시대에 대비해 몇 배나 많이 징수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네로가 속주세를 면제했던 많은 도시들에게 다시금 속주세를 받았으며, 공유지를 무단으로 점유하고 있던 사람들로부터 땅을 회수하였다. 이런 여러 조치들은 그를 탐욕스런 인물이라는 평판을 얻게 하였다.

 

 

콜로세움

 

하지만 여기서 생각해볼 문제는 이런 여러 정책들에 시민들이 반발할 만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내가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베스파시아누스가 시행했던 또 다른 정책 때문이다. 그것은 소위 이야기하는 시민 통제를 위한 '3S 정책'이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네로에 의해 받았던 불만과 불평, 자신이 펼치는 정책들에 대한 불만과 불평을 다른 것을 통해 해소해주기 위해 시민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3S 정책을 폈던 것이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검투경기다. 네로 황제의 잔재를 완전히 씻어버리고자, 네로가 지었던 황금궁전을 밀어버리고 그 장소에 7만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을 세웠다. 이것이 바로 '콜로세움'이다. 콜로세움을 통해 수많은 검투경기를 벌이는데, 당시에는 일종의 스포츠 경기라 할 수 있겠다. 시민들이 가진 불만과 불평을 해소시키기 위해 스포츠 경기장을 지은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검투경기를 보며 그동안 받았던 스트레스를 해소하게끔 하고, 모든 시선을 이 곳에 쏟게 만들어 불만과 불평들을 잡아냈던 것이다. 이러한 정책들은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있었고, 세계의 많은 나라들에서 시행했었다.

 

 

이 건축물은 최초로 바깥쪽에 총 76개의 아치를 만들어 그것을 입구로 활용하여 외관을 아름답게 하면서도 좀 더 수월하고 안전하게 7만명의 인원이 들어가고 나갈 수 있게끔 한 것도 건축학적인 측면에서 대단한 업적이라고 일컬어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재에 존재하는 모든 원형 스타디움은 이 콜로세움을 원형으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어쨋건 네로 사후, 수많은 내전과 반란으로 황폐해졌던 로마를 복구해낸 베스파시아누스는 즉위 10년만인 79년에 죽음을 맞게 된다. 어떻게 보면 로마의 재정 뿐만 아니라 군사적인 측면에서 로마를 예전의 상태로 되살려낸 현명한 군주였다고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강압적인 군인 황제였다고도 할 수 있는 인물일 수 있겠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내란을 종식시키고 길고 긴 시간동안 건설된 로마제국의 붕괴를 막은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만일 베스파시아누스가 로마에 안정을 가져오지 못했다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로마의 역사는 없는 것일수도 있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베스파시아누스는 위대한 로마의 황제 중 한명이라해도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79년 베스파시아누스가 죽은 후에는 아들인 티투스가 황제에 올랐고, 티투스 이후에는 그의 동생인 도미티아누스가 황제에 올랐다. 이 세 사람이 황제에 올랐던 이 왕조를 플라비우스 왕조라고 칭한다.

 

 

언제나 같은 이야기를 하지만 로마의 역사는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재미있는 내용이 많다. 내가 쓰는 내용들은 단편적인 이야기일 뿐, 그 이야기들을 모두 써낼수는 없다. 그 내용이 너무 방대하기도 하고, 너무 길면 재미가 없으니까...(지금도 많이 길다고 생각함...-_-, 그래도 줄이고 줄인게 이정도면 말 다했다...)어쨋든 시간이 난다면 로마의 역사를 제대로 공부해보도록 하자!

 

 

다음에는 로마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5명의 황제 '로마의 오현제' 등장의 시작을 알린 '네르바'와 로마제국의 번성을 다시 한번 일궈낸 '트라이아누스'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