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고대 로마 이야기 #.3-4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
로마가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제정으로 들어서고 난 후, 그의 혈통에 의해 그 권력이 계속해서 옮겨지게 되는데, 그 황제들을 모두 이야기하자면 그 양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부터 그들에 대해 정~말 간략하게 줄여서 이야기 해보도록 하자.
아우구스투스가 죽고 난 후, 그를 이어 황위에 오른 사람은 그의 양자인 티베리우스다.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13년에 29세의 나이로 집정관에 오르게 되고, 기원전 6년에는 후계자 문제가 거론되자 원로원과 세간에 생겨날 오해를 피하기 위해 자진해서 공직에서 물러나 로도스 섬에서 조용히 지내다, 4년 후에 로마로 복귀한다. 서기 14년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하고,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친 손자였던 가이우스와 루시우스가 죽었기 때문에 티베리우스를 후계자로 지정하고 원로원은 티베리우스를 황제로 선언한다. 황제가 된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개혁안을 옹호하며 지나친 향락과 사치를 억제하면서도 가난한 자들에게 식량을 공급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성군으로 칭송받았지만, 통치 말기에 들어서면서 근위병에게 권력을 위임한 채, 은둔생활을 하기도 했고, 임기 중간에 역모까지 발생하면서 공포정치를 펴게 된다. 자신의 통치에 반대하는 자를 잔인하게 처벌하고 죽였으며, 은둔생활 중에는 좋지 않은 소문들이 퍼져, 후에는 폭군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하지만 현재에 들어서 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린다.
칼리굴라
티베리우스가 죽자 그의 뒤를 이은 것은 가이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다. 후에 그는 자신의 별명으로 불리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작은 군화라는 의미의 '칼리굴라'다. 칼리굴라가 황위에 오르게 되는 경위에 대해서는 말이 많은데, 티베리우스 황제의 자연사로 정식으로 후계자에 지명되어 황제에 올랐다는 설과 티베리우스를 암살하고 등극한 황제라는 설이다. 후자의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그것이 바로 글래디에이터다. 서기 37년 황제가 된 칼리굴라는 처음에는 티베리우스가 폈던 공포정치로 혼란해져 있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여러가지 정책을 시행하여, 원로원과 군대, 민중들에게 환영받았다. 하지만 이렇듯 모두의 환영을 받던 칼리굴라는 죽을만큼 중병을 앓게 되는데, 이후부터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칼리굴라는 비록 병 때문이지만 자신이 죽을 위기에 놓이자, 그의 측근인 근위대장이 칼리굴라의 조카를 심중에 두고 후계자에 대한 내용에 손을 써두는데, 이후 칼리굴라가 병석에서 일어나자 그 일을 알게되었고, 그에 연루된 근위대장과 자신의 조카를 죽이게 된다. 이후 그의 본성이 드러난 것인지, 아니면 중병을 앓고 난 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컸던 것인지 그는 점점 폭군으로 변해간다.
반란의 누명을 씌워 귀족들과 원로원을 처형하고, 반역의 문서를 앞세워 모든 원로들을 강하게 탄압하였으며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였다. 그 돈으로 사치와 향락을 즐기며 지냈는데, 그 대표적인 내용으로 로마에는 '달의 여신 다이애나'가 살았던 전설의 연못이 있는데, 그 연못에 엄청난 초호화 유랍선을 띄워 유흥을 즐겼다고 한다. 실제로 이 유람선이 무솔리니에 의해 발견되었으나, 이후 불타 사라졌다. 정치에는 무관심하고 유흥만을 즐기다보니 암살음모가 계속되는데, 이에 신물을 느낀 칼리굴라는 급기야 로마의 수도를 이집트 북부의 알렉산드리아로 옮기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여기에서 원로원 귀족들의 극단적인 분노를 사게 되었고, 결국 즉위 4년만인 기원전 41년 근위대와 원로원이 결탁하여 그를 암살하게 된다. 이후 칼리굴라를 암살한 근위대는 그의 식솔들을 모두 죽이고, 그와 관련된 모든 기록들을 말살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원로원은 공화정으로 되돌아가려 힘을 쓰지만, 근위대는 자신들이 모실 황제가 있고, 그로부터 급여를 받아야 먹고 살길이 열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원로원의 주장을 묵살하고 칼리굴라의 삼촌이었던 클라우디우스를 새로운 황제로 추대하게 된다.
클라우디우스는 칼리굴라가 암살될 당시 그의 방 커튼 뒤에 숨어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근위병들은 칼리굴라의 친인척인 그를 보았음에도 그냥 지나쳤다고 한다. 아마 다음 황제로 옹립하기 위한 내용을 미리 정해놓고 벌인 일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클라우디우스
어쨋든 칼리굴라가 죽은 후, 근위대에 의해 옹립된 4대황제 '클라우디우스'는 몸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말을 더듬었고, 한쪽 발을 질질 끄는 등 선천적인 장애를 갖고 태어나 황실에서는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이유에서 근위대가 그를 옹립한 것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영리하고 지혜로웠으며, 특히 역사가로써의 능력이 탁월했다고 하는데, 그의 스승인 역사학자 티투스 리비우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근위대에 의해 황제가 된 클라우디우스는 가장 먼저 칼리굴라 황제를 암살한 암살범을 체포하여 처형한다. 그러면서 통치 초기 클라우디우스는 칼리굴라의 치세 속에서 떨어질대로 떨어진 황제정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를 회복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는 여러가지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세법을 확립하고, 국가 재정의 지출을 효과적으로 컨트롤하면서, 세금 관리자의 부정행위를 막기 위해 직접 법정에 들락거리면서 칼리굴라에 의해 바닥이 드러난 국가 재정을 성공적으로 재건해냈다. 또한 칼리굴라가 벌여놓은 유대인에 대한 문제는 서기 45년 그들을 모두 그리스의 코린토스로 이주시킴으로써 해결했다. 그가 한 일 중 가장 큰 일로 생각되는 것은 바로 수도사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는 것이다. 당시 모든 과학적 지식을 총동원하여 로마 근처의 강으로부터 마실 수 있는 식수를 바로 로마 시내로 끌어들여오는 상수도를 설치했다는 것은 물을 길어오기 위해 멀리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따. 이것은 멀리 가지 않고서도 로마 안에서 의식주 모두가 해결가능 하다는 의미였고, 그러다보니 로마는 사람들이 모두 모여,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며, 함께 즐길 수 있게 되어, 한단계 더 발전된 형태로 나아가게 된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클라우디우스는 통치 말미에 칼리굴라의 여동생이라는 이유로 멀리 유배를 당했던 아그리피나와 결혼하게 된다. 그녀는 매혹적이었으면서도 한편으론 야망가적 기질이 다분했다. 원로들은 폭군 칼리굴라의 여동생을 부인으로 맞이한 클라우디우스를 맹비난했으나 막지는 못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아그리피나는 커다란 야망을 지닌 여성이었다. 애초에 클라우디우스와 결혼한 목적도 그의 오빠, 칼리굴라가 가졌던 권력을 자신이 그대로 받고 싶어였을 수도 있다. 어째됐건 아그리피나는 클라우디우스와 결혼했고 아들을 낳게 된다. 아들이 태어난 후, 그녀는 클라우디우스를 죽이고 그의 권력을 어린 아들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그리고 어린 아들이 황위에 오르면, 황제의 어린 나이를 빌미로 섭정으로써 자신이 직접 로마를 통치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클라우디우스의 식사에 독버섯을 넣어 그를 독살한다. 그렇게 서기 54년 클라우디우스는 칼리굴라의 여동생이자 자신의 아내인 아그리피나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클라우디우스가 죽은 후, 아그리피나에 의해 다음 황제로 등극한 어린 아들이 바로 또 다른 폭군인 '네로황제'다.
오늘은 이 두명에 대해서만 가볍게 이야기하도록 하자. 다음에는 자신의 어머니에 의해 어린 나이에 황제로 옹립되어, 나중에는 폭군으로 변하게 되는 황제, 네로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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