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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고대 로마 이야기 #.3-3 로마의 진정한 1인자, 아우구스투스

[로마] 고대 로마 이야기 #.3-3 로마의 진정한 1인자, 아우구스투스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이후, 카이사르의 유언장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된 어린 소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에 맞서 권력을 거머쥔 소년. 그 소년이 바로 후에 '아우구스투스', '존엄한 자'로 불리우게 되는 옥타비아누스다.

 

 

옥타비아누스는 어릴 때부터 로마를 떠나 외국에서 생활했다. 몸은 비록 강건하지 않았지만 굉장히 영리하고 총명했다. 카이사르는 나이는 어리지만 그러한 기질을 가진 옥타비아누스를 눈여겨보고 자신의 후계자로 결정하고, 자신의 오른팔인 안토니우스에게 자신의 죽으면 유언을 전하도록 한다. 여기에 옥타비아누스의 약점인 전사로써의 기질을 보완해주기 위해 최고의 장군감이었떤 아그리파를 친구이자 그를 보좌할 인물로 그의 옆에 붙어있도록 한다. 이토록 일찍, 어린 나이의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결정한 것은 자신이 그렇게나 빨리 암살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자신의 권력이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을 알고 일찌감치 자신의 후계자를 정해놓은 것일수도 있다. 어쨋든 옥타비아누스가 19세가 된 해, 카이사르는 암살당하게 된다.

 

 

카이사르가 암살을 당할 때, 옥타비아누스는 공부와 군사훈련을 같이 하며 일리리아의 아폴로니아에 거주하고 있었다. 측근의 장교들은 옥타비아누스가 후계자로 지명이 되었지만, 그 권력을 안토니우스가 빼앗아 갔다는 것을 알렸다. 그러면서도 안토니우스의 혹시 모를 암살시도를 대비해 피신할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 권리를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로마로 당당하게 돌아가 카이사르의 정당한 후계자는 자신이라고 주장하며 카이사르의 군대를 결집시켰으며, 카이사르의 유언을 왜곡하는 안토니우스에게 당당히 맞서며 차근차근 안토니우스와 대결을 준비해 나간다.

 

 

키케로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후계자로 지명된 사실 이외에는 안토니우스에게 군사력, 재력, 경력, 인맥 뿐만 아니라 어떤 부분에서도 이길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안토니우스에게 밀려버릴 수도 있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카이사르의 독재를 비판하던 키케로의 도움으로 숨을 틔울 수 있었다. 키케로는 카이사르의 권력을 그대로 이어 받으면서 독재관이 되려하는 안토니우스를 비판했다. 원로원의 대표격이자 당대 최고의 연설가였던 키케로가 안토니우스를 비판하고 나서자, 원로원들 역시 그를 비판했다. 한편으로는 안토니우스가 주정하던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비난을 막아주기도 했으며, 후에는 안토니우스가 로마에서 평판을 잃고 갈리아로 이동하게끔 만들었다. 상황에 맞춰 생각해 본다면 키케로가 옥타비아누스의 편을 든 것은 당시 안토니우스의 야망을 막고자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키케로도 옥타비아누스가 가진 야망을 미쳐 파악하진 못했다.

 

 

어쨋든 키케로의 도움은 옥타비아누스가 정치적, 군사적으로 옥타비아누스가 성장하는데 있어 큰 도움이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당장 정면대결을 하기보다 일단은 강력한 그와 손을 잡고 훗날을 기약하기로 한다.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누이인 옥타비아를 안토니우스와 결혼시키고,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2차 삼두정치를 시작한다. 하지만 이들의 삼두정치는 자기들에게 공통되는 눈앞의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한 일시적 동맹이었다. 삼두정치가 시작되자 공화정을 지지하던 귀족세력이 대거 숙청당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필리피 전투가 발생했고, 카이사르 암살에 앞장 섰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격파하고, 이후 폼페이우스마저 격퇴한다. 이 과정에서 레피두스가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실각하게 된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가 실각한 후, 옥타비아누스는 현재 로마의 근본이 되는 로마와 서방을 맡고, 안토니우스는 경제력이 탁월한 이집트와 동방을 맡아 지배하게 된다. 옥타비아누스는 정치의 중심인 로마에서 카이사르를 신격화 시키면서, 그의 후계자인 자신도 자연스럽게 신격화 시켰다. 또 근간이 되는 로마지역을 자신이 통치하게 되면서 진정한 로마의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게 되었고, 상황은 이렇게 점차 옥타비아누스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게 된다. 반면 이집트로 간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애첩이었던 클레오파트라 7세에게 빠져 자신이 로마의 장군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클레오파트라와 사치스럽고 방탕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옥타비아누스는 이 일을 기회로 삼아 클레오파트라가 로마를 위태롭게 할 것이며, 안토니우스는 로마가 아닌 이집트에 붙어 로마를 뒤흔들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바탕으로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을 설득하여, 안토니우스의 집정관 권한을 공식적으로 박탈하고 이집트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을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군대를 이끌고 옥타비아누스가 이끄는 로마군과 맞붙게 된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옥타비아누스는 장군으로써의 역량은 부족한 편이었다. 뛰어난 전사는 아니란 말이다. 그러다보니 전쟁터에서 뼈가 굵은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를 얕보고 있었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그 누구보다 카리스마 있고, 탁월한 지략가였다. 여기에 카이사르가 어린 옥타비아누스를 지켜보며 그의 약점으로 지적받았던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로마 역사에 길이 남을 최고의 장군, 아그리파를 붙여주었다.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1년 악티움에서 안토니우스와 맞붙어 크게 승리했다.

 

 

정적들을 포함해 자신을 위협하던 안토니우스마저 제거된 로마로 귀환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진정한 1인자로 등극하였다. 그의 앞을 막을 세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권력을 넘어서는 힘을 가진 존재가 되었고, 그 누구도 맞설 수 없는 군사력과 재력으로 원로원마저 압박하며 제어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정계에 진출하면서 애초부터 커질대로 커진 로마를 공화정 체재로는 더 이상 컨트롤 할 수 엇다고 판단하고 있었고, 그를 그대로 이행했다.

 

 

그 결과, 기원전 27년 원로원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직접 '존엄한 자'를 의미하는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올리면서 공식적으로 로마의 황제로 인정했다. 황제로 추대되는 자리에서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시민)여러분이 지금 밟고 있는 이 땅이 나중에는 모두 대리석으로 바뀔 것이다.'라는 취임사를 남겼다고 한다. 이후에도 아우구스투스는 '임페라토르'라고 불리는 강력한 군통수권을 가졌고, '프린켑스'라는 원로원 1인자 칭호까지 받음으로써 귀족 원로원을 장악했다. 그 뿐만 아니라 호민관이 가지고 있던 민회소집, 입법권과 거부권까지 갖게 되었고, 자신의 후계까지 직접 정함으로써 권력의 상속도 제도화 시켰다. 로마가 진정한 황제정의 시대로 넘어오게 된 것이다.

 

 

아우구스투스가 황제가 된 이후, 대외적으로는 숙적 파르티아(현재 이란 지역)를 무찔렀고 로마 내에서는 신분질서를 다시 수립하고, 풍기 숙정 등을 단행한 것 외에도 치안과 식량 문제에 집중하여 로마시의 질서를 정비했다. 또한 대규모 건축사업도 일으켜, 벽돌의 도시 로마를 대리석의 도시로 변모시켰다. 취임사에 했던 아우구스투스의 말이 그대로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여러가지 측면에서 볼 때, 로마 황제정의 시작은 카이사르가 아니라 아우구스투스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카이사르에 의해 바탕이 다져지고,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실현된 황제정. 황제정이 시작된 초기이다 보니 아우구스투스는 특히나 내정에 충실을 기해 그의 통치기간 41년 동안 로마의 평화시대가 지속되었고, 라틴문학의 황금시대를 탄생시켰다. 로마는 아우구스투스 이후 200년 동안 이러한 평화기를 계속 갖게 되는데, 이 시기를 바로 '팍스 로마나'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