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고대 로마 이야기 #.3-2 악티움 해전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옥타비아누스의 제 2차 삼두동맹이 맺어지지만 이내 붕괴되고, 로마의 1인자가 되기 위해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다. 이 전투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게 되면서 로마의 초대 황제에 오르게 되는데, 그 계기가 된 악티움 해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옥타비아누스
카이사르는 자신의 권력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암살되기 전, 그의 권력과 재산을 그의 양자였던 옥타비아누스에게 물려주겠다는 유언을 남겼고, 그 유언의 집행인으로 안토니우스를 임명하게 된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를 도와 갈리아 정복을 일선에서 이끈 최고의 장수중 한명으로 카이사르의 오른팔이라 불렸던 사람이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암살되고, 자신의 업적에 대한 별다른 댓가가 돌아오지 않게 되자, 당시 18세로 굉장히 어렸고, 외국에 나가 있었던 옥타비아누스 대신 자신이 그 권력과 재산을 다 이양받고 옥타비아누스가 돌아오면 제거하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대담하게도 옥타비아누스는 암살의 위험을 안고 자신의 오른팔인 아그리파와 함께 로마로 귀국한다. 이에 안토니우스가 유언집행을 하지 않은 것이 드러나게 되었고, 옥타비아누스는 아그리파의 도움으로 암살에 맞서나가며, 다른 한편으로는 나이에 맞지 않는 노련함으로 카이사르의 후계자임을 내세우며 유력한 인사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나간다. 그렇게 정치적인 힘을 확보한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43년 자신 못지 않게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던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에게 함께 공동으로 통치할 것을 제안한다. 이에 북이탈리아의 볼로냐에 모인 세명의 카이사르파,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는 힘을 합쳐 반대파를 숙청하고, 카이사르 암살에 일선에 서 있었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격파하자는 결의를 한다. 이에 기원전 42년 필리피 전투에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앞세운 반대파를 격퇴한다. 반대파가 필리피에서 패배하자 삼두정치에 반대하는 사람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하나만이 남게되었다. 카이사르파 세명이 승리하자, 삼두정치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고,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로 돌아가고,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와 동쪽의 속주들, 레피두스는 히스파냐와 아프리카의 속주들을 각각 맡아 통치하게 된다.
아그리파
기원전 36년, 옥타비아누스의 심복인 아그리파가 메시나 해협 인근에서 마지막 반대파 폼페이우스 군을 격퇴하게 되는데, 이후 레피두스가 패배한 폼페이우스 휘하의 군대를 받아들이게 된다. 레피두스는 이 군대를 끌어들여 자신의 세력을 확대하고자 하였지만, 이 일을 알게된 옥타비아누스의 야간 기습에 당하면서 군대 지휘권을 완전히 빼앗기고 정계에서 은퇴하게 된다. 이렇게 레피두스가 일찌감치 실각하여 삼두정치의 무대에서 내려오게 되면서, 힘의 균형이 무너지고 기원전 33년부터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간의 내전으로 변하게 된다.
어쨋거나 안토니우스는 동방의 속주를 맡게된 후, 클레오파트라 7세를 탑소스로 불러,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있었을 당시의 반란혐의를 조사하게 되었는데, 이 때부터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지내게 된다. 여담으로 덧붙이자면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의 유언에서 자신과 카이사르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던 카이사리온의 이름이 전혀 거론되지 않은 것에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당시 로마에 머무르고 있던 클레오파트라는 유언을 들은 후, 권력다툼이 시작될것을 예상하고 다시 이집트로 돌아간다.
사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의 애첩이 되었을 당시부터 그녀를 연모하기 시작했는데, 때마침 이집트를 자신의 통치영역 아래 두게 되자, 클레오파트라를 찾아 이집트로 향하게 된다. 클레오파트라는 이때부터 안토니우스를 사랑의 노예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안토니우스는 그녀에게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게 된다. 그녀의 이번 작전 역시 자신의 이집트를 다시 세우기위해 로마의 권력자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지면서 나락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데, 안토니우스는 거대한 영지를 비롯해 엄청난 선물을 클레오파트라에게 가져다 준다. 이렇듯 안토니우스가 로마를 떠나 이집트에만 계속 머물게 되자, 로마 안에서 안토니우스의 정치적 영향력을 급격히 약해지기 시작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때를 놓치지 않았다
이미 레피두스는 권력다툼에서 밀려난 상태였고, 안토니우스만 없다면 1인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안토니우스는 이렇게 때를 기다리던 옥타비아누스에게 자신을 공격할 명분을 주게 된 셈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스스로를 동방의 군주제로부터 공화국을 지키는 수호자로 자부하면서 근처 사르디아, 아프리카, 갈리아에서 로마의 동맹국들을 끌어모아 안토니우스를 공격할 준비를 한다. 이 때 이미 옥타비아누스는 커질만큼 커진 로마가 더 이상 공화정체제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이전의 카이사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안토니우스와의 싸움이 누가 로마를 지배할 것인가를 가르는 결정적인 전투가 될 것이 분명했다.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을 때, 안토니우스 역시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그리스의 해안 에페수스에서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안토니우스는 먼저 코린트 만에 위치한 파트라라는 마을에 야영지를 마련했다. 이곳에는 그리스 이오니아 해안의 코르시라부터 남쪽으로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해상의 주요 해군기지 중 하나였다. 이 해군기지들을 이용해 이집트로부터 군수품을 실어나르고 옥타비아누스의 공격에 방어진으로서 역할을 하도록 하기 위해 구축한 것이었다. 그리고 주력부대는 파트라의 북서쪽에 위치한 또 다른 해군기지인 악티움으로 이동했다. 브라키아만의 입구에 있는 좁은 해협 사이 남쪽 해안에 위치한 악티움은 육중한 크기의 이집트 함대가 정박하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와의 전투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육군과 해군 모두 클레오파트라의 이집트 군대와 합류하여 숫적인 측면에서는 물론이고, 전투장비 역시 앞서 있었기 때문이다. 육상에서는 당연한 승리를 예상하고 있었고, 해상에서는 옥타비아누스가 많은 해군기지들을 뚫고 오더라도, 앞선 전투로 약해진 옥타비아누스의 군대를 악티움에서 격퇴할 자신이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처치하기 위해 함대를 이끌고 악티움으로 향했다. 기원전 31년 9월, 옥타비아누스와 아그리파가 이끄는 가볍고 빠른 속도의 전투선단과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육중한 전투선단이 악티움에서 맞붙게 된다. 하지만 빠른 기동력과 까마귀라는 신무기로 무장한 옥타비아누스의 전투선단에 안토니우스의 전투선단이 전혀 상대하지 못하게 된다. 이에 가장 결정적인 이유중 하나는 안토니우스가 구성한 전투선단의 선원들이 대부분 육군 출신의 병사들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아그리파의 맹활약으로 안토니우스 함대와 군대가 주둔해있던 악티움 근처를 옥타비아누스의 군대가 점령해버리자, 사방으로 포위된 안토니우스의 군대는 악티움에서 크게 패퇴했다. 가까스로 도망친 안토니우스는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클레오파트라 함대와 합류하여 이집트로 도망친다. 하지만 이 가운데서도 패색이 짙어지자 안토니우스의 군대 중 일부는 옥타비아누스에게 대거 투항했다.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의 영리함과 오른팔 아그리파의 전투지휘력, 민첩한 옥타비아누스의 함대를 너무 쉽게 본 것이 결정적인 패퇴요인이었다.
악티움 해전 상황 지도
승기를 잡은 옥타비아누스는 이집트의 동부에 있는 펠루시움을 점령한 후, 알렉산드리아 근처까지 진격해왔다. 상황이 여기까지 이르자 안토니우스는 최후의 이전을 감행하기로 한다. 기원전 30년 8월,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남은 병력과 자신의 병력 모두를 이끌고 알렉산드리아 항을 떠나 옥타비아누스 함대를 공격한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 함대에 비해 안토니우스의 함대는 너무나도 작은 규모였고, 육지, 해상 모두에서 대패하게 된다. 이후 옥타비아누스에게 패배한 안토니우스는 원로원직을 상실했고, 옥타비아누스의 제안을 받은 클레오파트라에 의해 살해당한다.
클레오파트라의 품에서 죽어가는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가 죽은 후 절망했지만, 이에 멈추지 않고 옥타비아누스마저 유혹하려 했지만 실패로 돌아가게 되면서 결국 자살을 택하게 된다. 클레오파트라는 사제에게 어떻게 해야하는지 물었다고 한다. 사제가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하자, 손에 코브라를 들고 가슴을 물게 하여 자살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미술작품의 주제로 많이 등장하는데, 코브라를 손에 든 여인이 작품속에 등장한다면 이 이야기를 그려놓은 것이라고 보면 되겠다. 어쨋든 클레오파트라의 입장에서 보자면 당시 쇠약해져가던 이집트 왕국을 다시 세울수 있는 방법 중 하나로 로마의 권력자의 힘을 빌린 것일 수 있겠지만, 결국에는 비극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이렇게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한 옥타비아누스는 이집트를 로마의 속주로 삼고, 그녀와 공모했던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병사들에게 보상으로 지급하였다. 기원전 29년,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로 귀환하여 화려한 개선식을 거행했다. 이 개선식을 시작으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초대황제에 등극하게 되고, 나중에는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옥타비아누스가 황제로 등극할 때 자신감 넘치는 멋진 말을 남겼다고 한다.
'(로마 시민)여러분이 지금 밟고 있는 그 땅이 제가 황제에서 물러날 때는 모두 대리석으로 바뀌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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