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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고대 로마 이야기 #.2-7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Gaius Julius Caesar (下)

[로마] 고대 로마 이야기 #.2-7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Gaius Julius Caesar (下)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어록으로 마무리했던 지난 글에 계속 이어나가 볼까요?

 

 

로마 내전 당시 카이사르의 경로 및 전투지역

 

 

카이사르가 로마로 진격해 들어오자 이때부터 본격적인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간의 내전이 시작되게 된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군대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로마를 모두 불태우고, 외부로 나가 전열을 가다듬기로 했다. 갈리아 정복을 끝낸 카이사르의 군대는 곧 배가 고플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이것이 최악의 선택이 되었다. 카이사르와 마찬가지로 여러 전투를 통해 경험을 쌓은 폼페이우스는 계속해서 시간을 끌고자 했으나, 성격 급한 귀족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카이사르 군에 선공하게 된다. 이로써 카이사르보다 몇배나 되는 군대를 가졌음에도 폼페이우스의 군대는 카이사르의 군대와 정면으로 한번 맞붙어보지도 못한채 카이사르의 전략에 패배하게 된다. 폼페이우스 혼자였다면 로마를 비우고 시간을 끌려던 계략을 성공적으로 진행시킬 수 있었을테고, 전투는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나, 폼페이우스가 원로원 귀족들의 부추김에 이기지 못한 것이 결정적인 패착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결국 카이사르는 아무런 저항없이 로마에 입성하여 폼페이우스의 군대를 격파한 후, 폼페이우스의 거점이었던 에스파냐마저 제압하고, 동쪽으로 도망친 폼페이우스를 추격, 기원전 48년 그리스의 파르살로스에서 폼페이우스를 필두로 한 정적들을 격파하고 로마의 내란을 마무리했다.

 

 

여기에 얽인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카이사르가 파르살로스에서 도망친 폼페이우스를 쫓아 이집트로 향한다. 자신을 지지하고 있었던 이집트의 왕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는데, 이미 전세가 카이사르 쪽으로 기운 것을 확신한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폼페이우스를 배신하고 암살한다. 이후 카이사르는 이집트에서 프톨레마이오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 간의 권력다툼에 끼어들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 7세와 손잡고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쫒아낸다.

 

 

후에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클레오파트라 7세는 당시 이집트에서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게 왕권다툼에서 패한 후,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유폐되기 직전이었다. 이 때 카이사르가 도망친 폼페이우스를 쫓아 이집트로 들어온 것이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자신의 힘으로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게 이길수 없다는 것을 알고 카이사르의 힘을 빌리려 하였다. 그래서 카이사르의 마음을 훔치기로 결정하는데, 그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그 방법이란 카이사르가 이집트를 정복하고자 작전회의를 하고 있을 때, 클레오파트라는 시종들을 시켜 카이사르에게 카펫을 선물하게 하였고, 선물 따위 주지 않아도 이집트 따위는 무너뜨리면 그만이라던 카이사르 앞에 카펫을 펼친다. 그 카펫 안에서 등장한 것은 다름아닌 반라의 클레오파트라였다. 당시 카이사르의 나이 53세였고, 클레오파트라는 21세였다. 지금 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에 의하면 카이사르가 그녀의 외모에 현혹 되었다기보다 '나이에 맞지 않게 카이사르와 말상대가 되는 총명하고 재치있는, 지식이 많은 여인이었을 것이다'라고 짐작된다. 이 사건에서 재미난 말이 하나 탄생하는데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다'라고 했던 파스칼의 말이다.

 

 

카이사르 앞에 나타난 클레오파트라 7세

 

어쨋거나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의 도움으로 이집트의 보호를 약속받았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좀 더 확실한 대답을 듣고 싶었고, 카이사르와 자신 사이에서 난 아들을 안고(그 아이가 정말 카이사르의 아이였는지, 아닌지는 그녀밖에 모른다.) 로마 원로원 건물로 걸어들어가 원로들에게 이 아이는 카이사르와 본인 사이에서 난 아들이라 이야기를 했는데, 처음엔 모두 믿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살리온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신과 카이사르의 아이를 원로원 바닥에 내려놓으며, '카이사르가 이 아이를 안아올린다면 그의 아들이고, 안아올리지 않는다면 그의 아들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한다. 당시의 카이사르는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거리낌 없이 아이를 안아올린다. 이 장면을 본 원로들은 카이사르를 옹호하는 옹호파와 그를 암살하고자 하는 편으로 갈라졌는데 결국 카이사르는 브루투스로 대표되는 암살파에 의해 암살당했다고 전해진다. 클레오파트라 7세의 이야기는 카이사르 사후 안토니우스에게까지 이어지게 되는데 이 부분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자.

 

 

여기까지는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에 얽힌 한 일화를 이야기 한 것이고, 이집트마저 자신의 아래에 넣은 카이사르의 이후 행적에 대해 이야기를 계속해보자. 기원전 47년 9월에는 소아시아 젤라에서 미트리다테스 대왕의 아들인 파르나케스를 격파하였고, 이 때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는 세마디의 유명한 보고를 원로원으로 보냈다. 이후 기원전 46년 스키피오(포에니 전쟁의 그 스키피오 아닙니다!)가 이끄는 폼페이우스의 잔당을 아프리카 탑소스 지방에서 소탕하고 오랜동안 지속되었던 원로원의 지배를 완전히 부숴버렸다. 기원전 45년에는 에스파냐의 문다 지역에서 폼페이우스의 두 아들과 싸워 승리하면서 기원전 49년 시작된 약 5년 간의 내전이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그 후 카이사르는 스스로를 독재관으로 선포하고 최고의 정치권력을 획득했다. 그는 얻어낸 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하고자 했던 식민, 간척, 토지제도, 항만, 도로건설, 공민권, 통치법규와 정치체제 뿐만 아니라 1년을 365일로 하는 율리우스력으로 역서까지 개정하면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급진적인 개혁을 실시했다. 공화정이긴 하지만 고도로 집중된 중앙집권제를 완성하고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대제국을 건설한 것이다. 하지만 결코 카이사르는 황제가 되고자 하지는 않았다. 단지 종신 집정관, 독재관으로 남아있었을 뿐이다. 종신 집정관으로써 카이사르에게는 각종 특권이 부여되었는데, 언제나 권력이 집중되면 왕위를 탐하는 자로 의심을 받기 마련이다. 결국 카이사르는 기원전 44년, 브루투스와 롱기누스를 주모자로 하는 카이사르 암살파에 의해 원로원 회의장에서 총 23번 칼에 찔린채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절친한 친구이자 총애하는 부하였던 브루투스가 반역에 가담한 것을 보고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한다.

 

 

'브루투스, 너마저...'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후, 그를 지지하던 민중들의 분노는 거셌다. 브루투스가 카이사르 암살이 정당하다고 주장했으나, 오히려 화난 민중들에게 공격당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카이사르 파와 암살파는 종신독재관이라는 지위를 제외하고는 카이사르의 유지를 그대로 받들기로 합의한다. 카이사르는 나중에 화장되었는데, 그의 유해는 때마침 내린 비에 모두 씻겨 내려가 버렸기 때문에 카이사르의 무덤은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카이사르 사후, 로마에는 안토니우스, 레페두스, 옥타비아누스의 2차 삼두정치가 성림하게 되었고, 암살파들과의 내전에 돌입하였다. 키케로, 브루투스 등 암살파가 모두 제거된 이후에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패권을 놓고 내전을 벌였다.

 

 

카이사르가 집정관에 오르면서부터 생각했던 현재의 로마, 즉 세계 제국으로 군림하게 된 로마를 지배하고 통치하는 것은 강력한 한 사람의 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 즉 군사독재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그의 양자였던 옥타비아누스에 의한 제정의 수립으로 현실화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치의 변화상으로 보더라도 옥타비아누스가 황제로 군림하면서 본격적인 제정이 시작되었다고 하겠다. 카이사르는 어디까지나 황제가 아닌 종신 집정관, 종신 독재관이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언제나 '인사를 다하고 운명의 여신의 도움을 바라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돈을 빌리는데 천재라고 알려진 그는 장군으로써의 능력, 연설가로써의 능력만 타고 났던 것이 아니라 갖고 있었던 인간적인 매력도 넘쳐 흘렀다고 한다. 그러니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 그렇게 모인 거겠지? 어쨋든 그는 늦게 출세길에 올랐지만 장군으로써, 그리고 연설가로써 타고난 재능을 보였고, 한편으로는 민심의 향방을 정확하게 파악할 줄 아는 통찰력도 갖춘 사람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저술한 '갈리아 전쟁기', '내란기'를 보면 간결한 문체, 정확한 현실파악 등 여러면에서 라틴 문학의 걸작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문학적 소양도 뛰어났던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책, 어떤 이야기를 들어보나 권력자들은 늘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 것 같다. 물론 전부가 그런것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그 권력에 따른 책임을 다한다면 누가 뭐라고 하겠냐만은 그래도 그 속에서 질투의 씨앗을 열리게 마련...어쨋거나 카이사르라는 인물이  세계의 역사를 뒤흔들었던 사람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다음에는 또 다른 이야기로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