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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고대 로마 이야기 #.1 로마 왕정의 시작

[로마] 고대 로마 이야기 #.1 로마 왕정의 시작

 

 

로마는 기원전 753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로물루스가 로마를 창건한 이래 기원전 509년까지 약 250년간 왕정이 이어졌다. 정확하게 남아있는 사료는 아니지만 전승에 따르면 로물루스를 포함하여 총 7명의 왕이 로마를 통치했다고 전해지는데, 처음 네명의 왕은 로물루스, 누마 폼필리우스,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마르키우스 였으며, 다음 세 왕은 에트루리아인으로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였다. 이 일곱명의 인물이 다스리던 시기를 로마 왕정 시대라고 부른다.

 

 

이 전에 이야기 했듯이 로물루스가 동생 레무스를 죽이고 팔라티노 언덕을 수도로 삼아 로마를 건국한다. 로물루스가 일곱개의 언덕을 중심으로 도시를 건설하고자 했던 것은 이곳이 상대적으로 주변 지역보다 높아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기에 적절했기 때문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언덕의 주변 지역은 비옥한 평원 지대였기 때문에 목축을 중심으로 하던 로마에 굉장히 적합한 지역이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알지 못했겠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로마가 강대한 국가가 될 수 있었던 기틀은 이 언덕들을 기초로 잡았던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라 하겠다. 이 위치는 이탈리아의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어 교통의 요충지로 활용이 가능했고, 주변에는 온천 침전물, 포석, 화산회 등 건축 자재로 쓸수 있는 자원들이 널려 있었다. 그려면서도 남북으로는 로마보다 상당히 발전해있던 그리스 문명과 에트루리아 문명을 끼고 있어 타 문명의 혜택도 충분히 받을수가 있었다.

 

 

포로로마노

 

 

로물루스의 건국신화를 보면 알겠지만 양치기들이 중심이 되어 세운 나라이다보니 초반의 로마는 목축을 주업으로 삼았다. 그러다보니 언덕 주변지역 이 외에도 더 넓은 목초지가 필요했다. 그래서 로물루스는 근처에 자리를 잡고 있던 사비니 인들과 전쟁을 하여 협정을 맺고 넓은 방목지를 함께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다 기원전 8세기에 지중해 근교에서 무역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로마로 에트루리아 인들과 그리스 인들이 진출했는데, 로마는 그 둘 사이에서 유리한 지리적 입지를 다져나갔다. 발달한 문명권의 에트루리아 인들이 로마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일부는 정착하였는데, 이들은 왕성한 상업 활동을 통해 이 지역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 뿐만 아니라 에트루리아 문자를 들여와 보급했으며, 금속, 점토, 가죽, 양털 등을 가공할 수 있는 기술을 전수해 주기도 했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축기술을 전수해 주었다. 이 건축기술을 통해 산지 촌락으로 구성되어 있던 로마는 성채 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 부분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로마의 포로로마노다. 에트루리아 인들의 건축기술을 적극 수용하여, 질퍽질퍽한 늪지대 였던 광장에 배수시설을 설치하고 기와 지붕을 갖춘 목재 가옥들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 당시의 통치체계는 왕과 원로원, 민회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왕정 초기의 왕은 최고 권력자이자 권위의 상징이기도 했다. 종신직으로 죽을 때까지 재임했으나 그 권력이 세습되거나 민회를 통해 선출되지는 않았다. 왕은 대귀족 가문의 장들이 선출하여 민회에서 확정받아 임명되었다. 하지만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를 포함한 에트루리아 출신의 인물들이 왕이 되기 시작하면서 왕은 군통수권, 사법권, 제사권 등 모든 권력을 쥐게 되었다.

 

 

원로원

 

 

원로원은 그런 왕에게 조언을 하는 각 가문의 지도급 원로들의 모임이었으며, 초반에는 왕과 함께 정치적인 결정을 함께 하고 입법기관으로써 상당히 높은 위치에 있었으나, 에트루리아 인들이 왕이 되면서 정치적인 결정을 하는 회의체로써의 역할은 줄여버리고, 순수한 자문회의로 격하시켰다. 당시의 이들은 입법권이 없었고 왕이 자문할 때 단순한 조언만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조언을 따르는 것도, 따르지 않는 것도 왕의 권한이었다. 원로들의 조언을 습관적으로 무시하고 거부하다 원르원의 미움을 사 마지막 왕이었던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는 왕위에서 축출되고 만다.

 

 

민회는 여러가지 형태가 있었다. 처음에는 쿠리아 회였다. 쿠리아회는 왕이 어떤 사업을 진행하고자 할 때, 그에 대한 재가를 받을 목적으로 소집할 때만 모였다. 민회는 로마를 대표하는 부족으로 구성되었고, 각 부족은 다시 열개의 쿠리아로 조직되었다. 각 쿠리아는 하나의 투표권을 가졌으며, 안건은 그들의 다수결에 의해 의결되었다. 가장 큰 역할은 법령을 제정, 전쟁과 화의 여부를 결정하였으며, 동맹 체결을 결정하는 것이었다. 기원전의 로마는 생각보다 굉장히 민주적인 체계를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게 왕정이 약 250여년간 지속되다가 고대 로마 왕정의 마지막 왕이었던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가 원로들의 의견을 상습적으로 무시한 채, 전제적인 통치를 일삼다가 로마의 폭력혁명이 일어나 왕정이 무너지게 되고, 공화정이 들어섰다고 한다. 하지만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넘어가는 단계는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로마왕정에 대한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기로 하고, 지금부터 일곱 명의 왕들에 대해서 간략하게 알아보도록 하자.

 

우선 초대 왕이었던 로물루스다. 굉장히 호전적인 성향의 로물루스는 목축을 중심으로 하던 로마를 발전시키고 국력의 원천인 인구를 증가시키기 위해 근처에 있던 사비니 족과의 전쟁을 통해 영토 협정을 이끌어 내고 양쪽의 주민들 간의 혼례를 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사비니를 로마로 복속시킨다. 그리고 원로원으로 대표되는 통치체계의 확립에 힘을 쏟았다.

 

 

누마 폼필리우스

 

 

2대왕인 누마 폼필리우스는 시비니 인 출신으로 기원전 717년 로물루스가 죽은 후, 원로원에 의해 새 왕으로 선출되었다. 처음에는 왕이 되어 달라는 원로원의 청을 거부했으나 가족들의 설득에 이를 받아들였다. 폼필리우스는 로물루스만큼 호전적인 왕이 아니었으며 신앙심이 깊고 교양이 높은 인물이었다고 한다. 이런 성향의 폼필리우스의 가장 큰 업적으로 알려진 것은 여러가지 로마 종교의식의 창설이었다. 우선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을 중심으로 하여 달력을 개혁하여 1년을 12개월을 정하고 일수를 355일로 정했다. 이 달력은 카이사르에 의해 365일로 개정되기 전까지 약 650년간 사용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제전일과 작업일을 정하였으며, 전쟁의 신인 야누스의 신전을 세워 주피터와 마르스 등 신관단을 두었으며, 베스타 여신의 무녀단을 조직하였다. 또한 최고 신관도 그가 창설했다고 한다. 당시 폼필리우스는 사람들에게 굉장히 존경받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기원전 673년 폼필리우스는 세상을 떠나게 된다.

 

 

폼필리우스에 이어 왕이 된 호스틸리우스 역시 사비니 출신의 인물로 로물루스와 마찬가지로 굉장히 호전적인 성향의 왕이었다. 호스틸리우스는 로물루스에 의해 재건된 알바롱가를 정복하여 로마의 종속국으로 삼았다. 하지만 이후 알바롱가의 족장이 로마를 배신하게 되는데, 이후 그는 알바롱가를 완전히 파괴했으며, 그 주민들을 로마로 강제 이주시켜 로마의 시민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 외에도 근처의 다른 부족과 여러차례 전쟁을 하였으며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실제로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로물루스보다 더 위대한 업적을 거두었다고 한다.

 

 

호전적이었던 왕 호스틸리우스가 죽은 후, 로마인들은 전쟁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나머지 평화를 우선시하던 마르키우스를 추대하였다. 이로써 마르키우스는 기원전 640년 로마의 4대 왕으로 등극했다. 그러자 로물루스와 호스틸리우스 시절 로마에 영토를 빼앗긴 근처의 민족들은 로마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우게 된다. 당시 로물루스에게 영토를 빼앗겼던 프리스키 라티니 족이 로마를 침공하게 되는데, 마르키우스는 평화주의자였으면서도 대단한 행정가, 사제 그리고 외교관으로써도 예상치 못한 능력을 발휘하여 프리스키 라티니를 패퇴시켰으며 그들을 로마로 흡수하였다. 이로써 모든 사람들은 마르키우스를 대단한 전사로 인식하게 된다. 그렇게 흡수한 사람들을 아벤티노 언덕에 정착시켰다. 마르키우스의 이 업적으로 테베레 강변의 남쪽에 소금밭을 로마가 통제할 수 있게 되었고, 최초로 목조로 된 수불리키안 다리를 건설했다. 마르키우스는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다음으로 왕위에 오른 사람은 취초의 에트루리아인 출신의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다. 타르퀴니우스는 그리스인 아버지와 에트루리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폐쇄적인 에트루리아에서는 혼혈이었던 그의 지위향상이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출신 불문하고 평등한 대우를 하던 로마로 이주하게 된다. 당시에는 왕을 투표로 선정하고 있었는데, 마르키우스와 그의 아들들의 부재를 틈타 로마인들의 호의를 얻을 수 있었다. 어쩌면 편법이라 할 수도 있겠다. 편법이든 아니든 왕위를 이어받게 된 타르퀴니우스는 통치자로써 굉장히 강한 인상을 남겼다. 에트루리아 인이 왕위에 오른 것에 불만을 품은 부족들의 군사적 저항을 물리치고, 영토를 지키는 것 뿐만 아니라 확장하였다. 군사적인 업적 이외에도 가장 큰 업적으로 꼽히는 것은 바로 배수장치를 설치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클로아카 막시마'라고 불리는 배수장치를 포로로마노에 설치하여 습지였던 광장의 수분을 테베레 강변으로 빼낼 수 있게 되자, 사람들의 모임장소로서 역할이 확장되고, 거주까지 가능하게 되어 나중에는 이곳에서 철학자나 과학자들이 서로의 이야기를 나눌수 있는 장소로 발전하게 된다. 이후 이를 바탕으로 후임자들에 의해 배수로는 더 늘어나게 되고 로마 발전의 주춧돌이 된다. 하지만 타르퀴니우스는 마르키우스의 아들들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되고, 그 뒤를 타르퀴니우스의 사위인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가 잇게 된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의 뒤를 이어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가 로마의 6대 왕으로 등극하게 되는데, 그에 관한 내용이 많이 남아있지는 않다. 그는 세르비우스 법전을 제정하였고, 로마시를 둘러싸고 있는 가장 오래된 성인 '세르비우스의 성벽'을 구축했다고 한다. 그리고 귀족과 평민의 신분투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군제를 개혁하고, '백인조합(百人組合)'을 중심으로 새롭게 민회를 구성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양아들인 타르퀴니우스에게 살해되고 그에게 왕위를 넘겨주게 된다.

 

 

로마 왕정의 마지막 왕인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는 잔혹함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름도 '오만한 타르퀴니우스'라는 의미다. 타르퀴니우스는 민중봉기에 의해 폐위당했는데, 결정적인 사건은 그의 아들인 섹스투스가 루크레티아라는 귀족여인을 겁탈하는 사건 때문이었다. 선왕을 살해한 타르퀴니우스는 왕위에 등극한 이후 20년이 넘게 로마를 다스리고 있던 때였다. 로마의 마지막 왕이 로마인들에 의해 쫓겨나자, 로마인들보다 앞선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에트루리아의 도시 클루시움의 왕 포르세나가 로마를 차지하려 덤볐으나 호라티우스 코클레스가 이끄는 로마군에 의해 저지당했다.

 

 

마지막 왕인 타르퀴니우스가 쫓겨난 후, 로마인들은 이제 왕에게 통치를 위임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 스스로가 로마를 통치할 시대가 왔다고 결론을 내리고, 본격적으로 공화정으로 들어서게 된다. 원로원 중에서 집정관이라 불리는 두 사람을 선출하여, 국가의 공동 수장 역할을 하도록 하였으며, 그들의 임기는 일년으로 정했다. 둘 중 누구라도 상대의 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권력에 자체적인 제한을 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로마가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들어선 것은 로마 왕정 후기에 즉위했던 왕들의 폭정으로부터 독립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위대한 로마로의 발전이 본격적으로 시작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로써 굉~장히 간략하게 로마 왕정에 대한 이야기는 마무리 짓도록 하고 다음에는 더욱 재미있는 로마 공화정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