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고대 로마 이야기 #.2-2 로마 공화정의 변화와 그 이유
전에도 이야기 했듯이 초기의 공화정에서는 왕정의 몰락으로 소수 혈통 귀족에게 그 권력이 이양되었다. 기원전 5세기 중엽, 집정관이라는 고위 정무관직이 등장했으며, 임기는 1년이었고 두 사람을 선출했다. 이를 이두정치라고 하며, 원로원은 이때까지도 자문기구에 지나지 않았고, 켄투리아회는 선거, 입법, 재판 등의 기능을 수행했다.
로마에는 시민계급으로 귀족과 평민 두 계급이 존재했는데, 공화정 출범 당시의 귀족계급은 굉장히 폐쇄적인 형태였으며, 후에 평민 계급은 이에 반발하여 사회정의를 요구했다. 초기에는 모든 공직이 귀족들에게만 열려있었고, 평민이 귀족으로 신분이 상승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 때의 로마는 계속된 군사정복을 통해 이탈리아 반도를 지배하게 되었는데, 기원전 5세기 말 에트루리아가 약화되자 로마가 그 힘의 공백을 메우게 되었고, 이후 인접 산지 민족인 티아퀴와 볼스키의 침입을 막아내고 태베레 강 북쪽에 위치한 에트루리아의 강력한 도시 베이를 병합시켰다. 그리고 기원전 343년부터 기원전 290년까지 이탈리아 아펜니노 산맥 남부에 살던 삼니움 족과 세차례 전투에서 모두 승리하면서 로마는 이탈리아 중부를 제패한다. 이런 일련의 상황을 통해 군대의 구성원이 되었던 평민들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게 되었고, 로마 평민들의 발언권이 점차 높아졌다.
로마는 이렇듯 많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듭하면서 귀족과 평민 사이의 다툼이 커져갔는데 그 다툼의 가장 큰 이유는 전리품의 배분에 있어 귀족들이 평민들보다 더 유리한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 중에 황폐화 된 로마 평민들의 땅을 다시 개간하기 위해서 더 많은 전리품을 가져간 귀족들에게 다시금 고리로 돈을 빌려야 했고, 갚을 능력이 없는 평민들은 귀족들의 노예가 되어야만 했다. 이런 불합리한 상황에 분노한 로마 평민들은 전쟁을 수행하는 것을 거부했고, 집정관은 이 부분에 대한 조치를 취할 것을 약속했으나, 또 한명의 집정관에 의해 다시 백지화 되었다. 기원전 471년 결국 로마의 평민들은 아벤티노 언덕으로 철수 투쟁을 벌였고, 자신들만의 민회인 트리부스 평민회를 조직하고 평민 권익의 옹호자 격인 호민관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호민관을 보좌할 조영관이라는 직책도 만들었다. 이때부터 호민관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 사건이 생기기 전까지의 법이란 것은 귀족들의 전유물이었으나 평민들이 법의 성문화(成文化)를 요구하여 로마법의 모체가 된 12표법을 제정하였다. 12표법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형식적으로라도 법의 평등성을 보장하게 되었다.
기원전 445년경 로마는 대외적인 군사적 위협에 직면하여, 군대의 주력을 이루는 평민의 지지가 더욱 중요해졌으며 이런 이유로 카툴레이우스 법이 통과되어 귀족과 평민 간의 통혼(通婚)이 허가되었다. 이로써 평민들이 로마의 지배계층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기원전 4세기에는 귀족과 평민간의 오랜 정치적 투쟁 끝에 귀족들이 평민 지도자들과 타협하여 두 명의 집정관 중 한 자리는 평민 출신에 할당하도록 하였다.
평민들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게 되자 사실상 신분 투쟁이 마무리 되었고, 기원전 287년 이후의 공화정에는 귀족과 힘을 가진 평민 출신의 원로원들이 주축이 된 신귀족이 등장하게 된다. 이후 약 150년간 로마는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게 되는데 바로 이 시기에 로마의 끊임없는 정복전쟁이 다시금 이어지게 된다. 이 정복전쟁으로 이웃 종족들을 정복하여 얻은 전리품과 영토는 가난한 평민들의 곤궁을 덜어주는데 이바지했으며, 귀족 지도자들은 정복 사업을 통해 군사적 명예와 정치적인 이득을 얻게 되었다.
당시의 정복전쟁 중 유명한 것은 기원전 264년,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반도 사이의 소도시인 메사나에서 일어난 용병 소요가 화근이 된 포에니 전쟁이다. 메사나와 마찬가지로 그리스계 도시였던 시라쿠사와 시작한 전쟁이 카르타고와의 전쟁으로 번졌고, 후에는 시라쿠사보다는 카르타고와의 전쟁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포에니 전쟁은 총 3차에 걸쳐 치러졌으며 이 전쟁에서 유명한 한니발과 스키피오가 등장한다. 포에니 전쟁에 대해서는 다음에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고, 이 포에니 전쟁으로 기원전 146년 카르타고는 멸망하였으며, 로마가 지중해 세계마저 제패하게 된다.
이 같은 로마의 정복전쟁은 로마의 경제, 사회, 정치에 혁명적인 파급효과를 끼쳤으며, 이후 공화정이 몰락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포에니 전쟁 당시 이탈리아는 전란으로 황폐화되고 전염병이 돌아 인구가 격감하였다. 또한 군대에 징집되었던 장정들도 정복한 땅에 정착하기보다 로마로 되돌아오거나 군대에 재입대하여 돈을 벌려고 하면서 가면 갈수록 농민의 수는 심각하게 줄어들게 되었다. 그리고 해외에서 전리품으로 얻게된 엄청난 양의 자본과 토지, 노예 노동력이 로마로 유입되면서 경제활동은 왕성해졌으나, 직업을 잃은 로마 시민들이 많아지게 되어, 그들로 인한 범죄율이 높아지고 도시 빈민들의 불만이 쌓여갔으며 공공질서와 정치 안정에 위협이 되었다.
원로원 역시 포에니 전쟁의 초기에는 지도력을 발휘하고 국익을 신장하며 절대적인 신망을 얻었으나, 상당한 전리품을 손에 쥐게 되자 국익을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자신들의 권력과 위신을 지키는데 급급했고 서로간의 편협한 전쟁을 일삼는 일이 많아졌다. 또 스키피오나 플라미니누스처럼 전쟁 영웅이 정계에서 권력자로 급부상하면서 개인에게 막강한 권력과 독립성이 부여되어 로마의 공화정 전통을 위협하게 되었다.
그라쿠스 형제
공화정 말기로 볼 수 있는 기원전 133년에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라는 호민관이 등장하면서 농지법을 제안, 권력자들이 과도하게 점유한 공유지를 부분적으로 재분배하고자 했다. 이때 그라쿠스는 관례를 무시하고 원로원의 자문을 구하지 않은 채, 가난한 시민에게 호소하여 이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평민회에 법안을 제출했다. 하지만 그라쿠스와 그를 지지하던 자들은 그들에 반대하던 원로원 세력에 의해 살해당한다. 이것이 로마 공화정 사상 최초로 발생한 정치폭력이다. 기원전 123년에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동생인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호민관이 되어 형의 농지법을 부활시키고 대규모 식민지를 건설하여 로마의 토지 부족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하지만 형과 마찬가지로 반대파의 사주를 받은 또 다른 호민관 드루수스가 시민들을 선동하여 그라쿠스에 대항했으며 기원전 121년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호민관 선거에서 탈락, 추종자들과 함께 반대파가 동원한 정치 폭력으로 죽임을 당했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원로원 귀족의 지위는 독립적인 성향의 정치가들 때문에 더욱 약화되었으며 원로원 내부도 원로원의 전통적 역할을 지지하는 벌족파와 민중의 의지를 내세우는 민중파로 분열되었다.
기원전 107년에는 기사계급 출신의 장군인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등장하게 되는데, 마리우스는 군에 복무하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재산이 있어야 한다는 자격조건을 철폐하고 무산자들이 군대에 지원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따라 병사들이 재대하게 되면 토지를 배분하여 생계 수단을 마련해주어야 하는데, 마리우스는 원로원의 반대를 무릎쓰고 토지 분배 법안을 통과시켜 퇴역병을 정착시켰다. 마리우스의 병제개혁으로 인해 병사들은 국가보다는 자신의 군사령관에 의지하고 충성을 바치게 되었다. 그 이유는 무산자였던 그들의 토지 분배의 여부가 자신들의 군사령관의 정치력에 의해 결정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로마 군단병이 군사령관에 의해 사병화가 되는 상황을 초래하게 됐다.
루시우스 쿠르넬리우스 술라
그리고 난 후, 마리우스파와 루시우스 쿠르넬리우스 술라 사이에 내란이 일어나게 되는데, 기원전 83년 마리우스파와의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승리한 술라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하여 종신독재관이 되었다. 독재관에 오른 술라는 정적들을 모두 숙청하고, 자신의 퇴역병사들을 이탈리아에 정착시켰다. 또한 원로원 의원의 수를 600명으로 늘리고 원로원의 통제권을 강화하여 공화정 헌정 질서를 복구하고자 했다.
하지만 술라가 기원전 78년 숨을 거두자, 그가 확립했던 공화정 체제는 다시 한번 도전 받게 되었으며, 특이한 점은 그 도전에는 사회의 하층민들도 가담한 것이다. 당시 집정관이었던 마르쿠스 레피두스는 반란군을 이끌고 로마로 진격하여 원로원에 개혁을 요구하였고, 스파르타쿠스가 노예 반란을 일으켰다. 기원전 63년에는 가난한 농민과 퇴역병이 가담한 카틸리나의 모반이 일어났다. 이렇듯 체제에 대한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폼페이우스 마그누사와 크라수스가 권력을 갖게 되었고 기원전 70년 집정관에 등극한다. 이들은 술라가 약화시킨 호민관의 권한을 다시 부활시켰다. 또 기원전 67년 제정된 기비니우스 법은 로마 대중의 지지를 받아 지중해 해적 소탕을 위해 폼페이우스에게 비상시 명령권을 부여했으며, 폼페이우스는 그 명령권을 기반으로 폰투스의 왕이었던 미트라다테스를 무찔러 동방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보수적이었던 원로원은 그의 퇴역병 정착을 위한 농지법과 그가 정비한 동방 속주 체제를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기원전 60년 벌족파 세력이 맞서 폼페이우스와 대중적 정치 지도자였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크라수스 세 사람이 제 1차 삼두정치를 체결했다. 당시 원로원은 장군들에 대한 통제권을 잃고 있었으며, 기원전 59년 카이사르는 다시한번 집정관에 올라 폼페이우스의 법안을 통과시켰으며 자신은 갈리아 속주의 총독에 임명되어 9년간의 갈리아 정복에 나선다. 그가 떠난 동안 로마에서는 도시 빈민들의 정치폭력과 소란이 심해졌다. 원로원은 질서를 회복하고, 갈리아를 정복하며 강대해진 카이사르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공화정을 버리고 '황제'가 되려한다는 명목으로 폼페이우스와 결탁한다.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암살하기 위해 기원전 49년 갈리아에 있던 카이사르에게 소환명령을 내리지만 그 내막을 알고 있던 카이사르는 자신의 군대를 그대로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를 장악한다.(당시의 로마는 루비콘 강을 건너기 전에 무장을 해제하지 않으면 반란으로 규정했다. 이 때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로마에 입성한 카이사르는 일련의 개혁을 수행했고, 종신 집정관을 등극하여 정적들을 숙청했다. 기원전 44년 독재를 우려한 몇몇 원로원 의원들에 의해 카이사르는 암살당하게 되는데, 그 일에 카이사르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부루투스도 가담하였다. 이후 카이사르의 오른팔이었던 안토니우스가 권력을 잡았으나, 카이사르의 양아들인 옥타비아누스와의 내전 끝에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면서 다시금 로마는 평화와 질서를 찾게 되었으며,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첫 황제가 된다. 이로써 로마의 공화정이 마무리되고 제정으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450년 간 지속되었던 로마의 공화정에 대해 굉~장히 간략하게 정리해보았다. 중간중간 역사적인 사건이 빠졌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차후에 다시 한번 글을 쓰도록 하겠다. 로마의 역사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 바로 이 공화정 시대인데, 시간이 있다면 영상이나 책을 통해 좀 더 자세하게 공부해보길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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