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프랑스를 구한 영웅, 잔 다르크(jeanne d'arc)
잔 다르크, 1412.1.6 ~ 1431.5.30
1337년 시작된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의 왕위 계승권 분쟁으로 시작된 백년전쟁.
그 전쟁은 이후 116년간 계속 되었다. 이 전쟁의 주요 전장이 프랑스였기 때문에 프랑스 땅과 시민들을 피폐하게 만들었고,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시민들은 어느 한쪽 편을 들어야만 했다. 그러는 중에 자연스럽게 보다 근대적인 국가의식과 애국심이 생겨났고 백년전쟁의 막바지에는 이런 의식의 변화 속에서 잔 다르크라는 인물이 나타나게 된다.
백년전쟁의 시작 당시, 프랑스 왕 샤를 4세가 후사없이 죽자 카페왕조의 직계가 끊어지게 되었고, 프랑크 왕국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온 살리카 법전에 의하면 여성은 왕위계승권에서 제외되게 되어있어 혼란이 찾아왔다. 샤를 4세 사후, 필리프 4세의 조카인 발루아 왕가의 필리프 6세에게 왕위가 넘어가게 되었으나, 필리프 4세의 외손자 격인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를 넘보기 시작하면서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실질적으로는 에드워드 3세가 필리프 6세보다는 카페왕조의 직계에 가까웠으므로 에드워드 3세 입장에서는 왕위 계승권을 주장할만 했다. 그렇게 시작된 백년전쟁은 전쟁 말미에 잔 다르크라는 인물이 나타나게 되면서 새로운 양상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백년전쟁의 후반, 프랑스 왕 샤를 6세가 죽자, 이번에는 프랑스 내부에서 권력 싸움이 시작되었다. 샤를 6세의 뒤를 이은 샤를 왕세자를 옹호하는 세력과 샤를 6세의 딸인 카트린 공주를 잉글랜드 왕 헨리 5세와 결혼시켜 왕위를 잉글랜드로 넘기려는 세력 간의 싸움이었다. 겉으로는 왕가와 귀족 간의 권력다툼이었으나 내부적으로 보면 실제로 피해를 입는 것은 아무 상관없는 백성들이다. 프랑스의 백성들은 이유도 모른채 병사로 동원되어 죽어갔고, 프랑스 사람들은 도버해협을 건너온 잉글랜드 군의 횡포에 적개심을 품게 되었다. 이 때부터 프랑스 사람들은 이전에는 없었던 뚜렷하지는 않으나 국가에 대한 의식을 하기 시작했고, 애국심이라는 것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은 구심점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잔 다르크다.
잔다르크는 프랑스 동레미 지역에서 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났다. 동레미는 프랑스 북동부 지역의 작은 마을이었는데 백년전쟁이 계속되던 당시에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의 접경지역이었으며, 잉글랜드 편을 들었던 부르고뉴 공국과도 경계를 맞대고 있었기 때문에 환란이 심했던 지역이었다. 잔 다르크가 있던 시기, 프랑스 발루아 왕가는 백년전쟁 시작후 가장 불리한 입장에 처해있었다. 샤를 6세의 아들 샤를 왕세자는 프랑스 북부를 잃어버렸고, 대관식도 치르지 못한 채,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동맹군에 밀려 프랑스 남부에 머물고 있었다.
잔 다르크는 이런 상황에 처한 샤를 왕세자의 최후의 보루가 되어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했다. 프랑스 병사들은 프랑스를 위해 싸우는 군인이기 이 전에 프랑스의 백성이었기 때문에 잔 다르크라는 어린 소녀의 눈물겨운 노력에 감격하였고, 그들의 애국심에 불을 지르는 계기가 되었으며 빨리 전쟁을 끝내고 나라와 가족을 구하겠다는 사명감으로 프랑스 군대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잔 다르크는 프랑스 병사들에게 승리의 여신으로 회자되며 전투의 마스코트가 되었다. 잔 다르크는 언제나 하얀 갑옷을 입고 병사들 앞에서 직접 전투를 지휘해고, 그에 사기가 치솟은 프랑스 군은 잉글랜드 군을 격파하기 시작했다. 전쟁에 연전연승하며 랭스지역까지 차지한 잔 다르크는 샤를 왕세자의 대관식을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샤를 왕세자의 프랑스 왕 즉위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샤를 왕세자는 잉글랜드의 헨리 6세보다 앞서 진행된 즉위식 후 샤를 7세라는 이름의 프랑스 왕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렇게 진행된 대부분의 일은 한명의 작은 소녀가 이루어낸 업적이었다.
하지만 샤를 7세는 즉위 후 점차 안이해지기 시작했다. 파리탈환을 통해 프랑스 내 잉글랜드 군의 완전축출을 주장하는 잔 다르크의 말을 무시한 채 1년을 보내다 다시 전열을 가다듬은 잉글랜드 군의 재공격을 받게 되었다. 샤를 7세는 잔 다르크 덕분에 즉위했으나 오히려 그녀의 치솟은 인기를 질투했다. 샤를 7세 뿐만 아니라 그를 따르던 귀족들도 백년전쟁 후 급부상한 그녀를 시기했다. 하지만 잔 다르크는 잉글랜드 군의 재공격에 다시 한번 나라를 위해 갑옷을 입었다. 하지만 프랑스 왕가의 지원은 미미했고, 결국 콩피에뉴 전투에서 패배하여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은 부르고뉴 군대에 사로 잡혔다. 부르고뉴 군대는 잉글랜드에 몸값을 받고 그녀를 팔아 넘겼고, 잉글랜드는 다시 샤를 7세에게 엄청난 금액을 제시하며 팔아 넘기려 했다. 하지만 샤를 7세는 그에 응답하지 않았고, 그녀는 잉글랜드와 부르고뉴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일곱 번의 재판 끝에 마녀, 이교도, 우상숭배 등의 죄를 뒤집어 쓰게 되었고, 그녀를 이단으로 몰았다. 그리고 잔 다르크는 19세의 나이로 그들에게 화형당하면서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잔 다르크는 백년전쟁이 끝난 후, 1456년에 가서야 마녀 혐의를 벗고 명예가 회복되었다. 이 또한 샤를 7세에 의한 것이었다. 또한 1920년 교회도 그녀를 성녀로 시성했다. 귀족도 아니었고, 남자도 아니었던 핍박 받는 민중의 딸, 잔 다르크는 오늘날까지 죽음의 비장미와 함께 열세한 입장에서도 일어나 세상을 바꾼 강인한 여성의 대명사로 자리잡았다.
일각에서는 잔 다르크라는 인물의 업적이 이렇게까지 거창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백년전쟁 당시 연전연패하던 프랑스 군의 사기를 끌어올릴 목적으로 만들어낸 업적들이 많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물론 그럴수도 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 아니라면, 아니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정확히 알 수 없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현시대를 사는 우리는 그저 사서가 전해주는 내용을 분석하고 그로써 짐작할 뿐이다.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은 당신의 몫이다.
<참고 : 네이버 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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