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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천재과학자, 아이작 뉴턴

[영국] 천재과학자, 아이작 뉴턴

 

아이작 뉴턴 (1642.12.25 ~ 1727.03.20)

뉴턴은 1642년 12월 25일 영국 링커셔의 울즈소프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뉴턴이 태어나기 전에 죽었고, 3살때 할아버지와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재혼해서 잘 살다가 양아버지가 죽자 고향으로 돌아와서 함께 살았는데, 어머니는 뉴턴이 농부가 되기를 바랬고, 공부하는 것에 들어가는 돈을 아까워할 정도로 교육에 무관심했다.

하지만 평소에 사소한 것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그의 특별함을 알아본 외삼촌의 도움으로 1661년 캠브릿지 대학에 입학한다. 입학 후, 돈이 없어 학교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근로학생 자격으로 공부했다. 어릴적 그는 굉장히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나고, 공부했다. 캠브릿지 대학에 입학한 뉴턴은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늘 메모를 했다고 한다. 자신이 쓴 메모들을 '생각의 샘'이라며 자랑스러워했다. 그 노트에는

 

'플라톤은 나의 친구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나의 친구다. 그러나 내 최고의 친구는 진리다.'

 

라는 유명한 문구가 적혀있었다고 한다. 캠브릿지 대학 졸업 후, 학교에서 자신의 연구를 계속하다가 그의 일생에 큰 일이 한번 닥쳐오는데, 바로 페스트, '흑사병'이다. 흑사병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자 대학은 일시적으로 문을 닫았고, 뉴턴은 1665년 울즈소프의 집으로 돌아온다. 바로 이때가 뉴턴의 창조성이 폭발하여, 훗날 그가 이룬 위대한 업적들 중 많은 부분을 이 시기에 해낸다. 그는 이 시기에 22가지나 되는 문제들을 동시에 연구하고 있었다. 과학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기간을 '기적의 해'라고 부른다.

 

이 시기 그의 가장 대표적인 업적의 예가 뉴턴의 사과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겠지만, 1666년 사과나무 아래서 졸고 있던 뉴턴의 머리 위로 사과가 떨어지게 되고, 잠에서 깬 그는 사과가 왜 아래로 똑바로 떨어지는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다. 지금의 우리로써는 왜 그가 그렇게 당연한 것에 의문을 가지게 되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말이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냥 그런가보다~하고 넘겨버렸을텐데, 그는 이 문제에 대한 연구를 계속 했고, 큰 발견을 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중력'이다.

사과가 아래로 떨어지는 데는 어떤 힘, 즉 중력이 작용하며 비단 사과뿐만 아니라 행성을 포함해 모든 우주만물에 적용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실제 일어났던 일인지 아닌지는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본인이 말년에 사실이라 이야기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시기의 또 다른 발견으로는 '유율법'이라고 하는 현재의 미적분법을 만들어냈으며, 빛의 성질에 대해 연구하여 빛이 희색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통념을 깨고, 빛은 여러가지 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것을 프리즘을 통해 증명해냈다. 이 모든 것이 그가 24세~25세 2년동안 발견해낸 업적들이었다.

 

페스트가 지난 후, 캠브릿지 대학이 다시 문을 열자 그는 다시 학교로 돌아와 특별 연구원 자격으로 연구를 계속 했다. 그는 먹는 시간, 자는 시간까지 아까워하며 독서, 연구에만 몰두했다. 결국 1672년 왕립학회의 회원이 되었는데, 그는 자신의 연구결과를 학회에 거의 발표하지 않았다. 자신의 연구가 도용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며, 자신의 연구에 대한 비판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에드먼드 헬리라는 사람 덕분에 자신의 연구성과를 발표하는데 인색했던 뉴턴이 책을 발표하게 된다. 헬리는 뉴턴이 책을 쓸 수 있도록 끊임없이 설득했고, 중도에 포기하지 않도록 계속해서 격려했다. 헬리라는 인물 덕분에 발표된 책이 바로 근대 과학의 기초가 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다. 뉴턴은 이 책을 1686년 4월 왕립학회에 발표했고, 이 후 총 3권이 발행되었는데 책의 인쇄비용까지 모두 헬리가 부담했다. 인재와 그 연구의 중요성을 알아본 인물인 헬리에 의해 근대 과학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이 기념비적인 책에 실린 대표적 내용은 과학의 세가지 법칙인 '관성의 법칙', '운동의 법칙', '작용-반작용의 법칙'과 만유인력, 천체의 운동 등에 관한 내용이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걸작으로 칭송받았으며, 철학자 존 로크는 뉴턴을 신처럼 여겼다.

또한 그는 신학에도 관심을 보이면서 성서의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고대사 해석을 검증하고, 천문학적 고찰을 첨가해 연대기를 작성해냈다. 이 성서연구를 통해 삼위일체설을 부정하는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

 

이처럼 뉴턴은 물리학 뿐만 아니라 광학, 수학, 철학, 신학 등 많은 분야에 업적을 남겼으며, 1688년 명예혁명 당시 대학 대표의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699년 런던 조폐국 장관으로 임명되어 화폐 개주(改鑄)라는 어려운 일을 수행했다. 1703년에는 왕립협회의 회장으로 추천되었고, 1705년에는 왕으로부터 '기사' 칭호를 받았다.

 

뉴턴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으며, 런던의 켄싱턴에서 사망, 장례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치러졌고, 그곳에 묻혔다. 그의 사후, 그의 연구결과는 18세기 계몽사상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영화 다빈치코드에 보면 '템플 기사단'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의 시신, 즉 '성배'를 지키는 임무를 가지고 있는데, 후에 수호자들은 '이단'이라는 명목으로 모두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 중 살아남은 자들이 세간에 드러나지 않게 대대로 성배를 지켜왔다고 하는데, 그들 중 하나가 바로 아이작 뉴턴이라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등장한다.

어쨋든 뉴턴은 많은 과학적 업적들을 남기고, 1727년 3월 85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뉴턴은 자신에 대해 이렇게 자평한다.

 

"나는 세상에 내가 어떻게 비치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내 자신이 바닷가에서 노는 소년이라고 생각했다. 내 앞에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는 진리라는 거대한 대양이 펼쳐져 있고, 가끔씩 보통 것보다 더 매끈한 돌이나 더 예쁜 조개 껍질을 찾고 즐거워하는 소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