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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중앙집권체제의 확립, 엘리자베스 1세

[영국] 중앙집권체제의 확립, 엘리자베스 1세

 

엘리자베스 1세, 1533.09.07~1603.03.24

 

엘리자베스 1세,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인 헨리 8세가 만들었던 프로테스탄트, 즉 영국성공회와 카톨릭 간의 분쟁에 있어 중립적인 위치에 서며, 두 종교 간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 했고, 중상주의 정책을 적극 추진하여 영국의 절대왕정의 기초를 확립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지금부터 그녀에 대해 알아보자.

 

엘리자베스 1세는 아버지인 헨리 8세와 그의 두번째 왕비인 앤 불린 사이에서 태어났다. 헨리 8세는 첫번째 왕비였던 캐서린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캐서린과 이혼하기를 희망했고, 그녀와의 이혼을 로마 교황이 허락하지 않자, 영국 성공회를 만들기까지 한다. 헨리 8세와 캐서린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 바로 메리였다. 그렇게 캐서린과 이혼을 하고 두번째 결혼을 하여 엘리자베스가 태어나게 되는데, 결국 메리와 엘리자베스는 이복자매 관계였다. 하지만 앤도 아들을 낳지 못하고 간통혐의로 처형당하고 만다. 헨리 8세는 이후에도 여러 명의 왕비를 두었는데,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병약한 에드워드 하나뿐이었다.

 

헨리 8세 사후, 장자인 에드워드가 그 뒤를 잇게 되는데, 그의 병약한 몸 때문에 오랜 기간 재위하지 못하고, 이른 시기에 병으로 죽고 만다. 그 뒤를 이어 헨리 7세의 증손녀 제인 그레이가 즉위하지만, 메리의 의해 9일만에 폐위되고, 헨리 8세의 첫번째 왕비인 캐서린의 딸 메리가 즉위하게 된다. 메리가 죽은 후, 엘리자베스가 즉위하게 되는데, 메리가 즉위할 당시 유럽은 종교 개혁에 의해 카톨릭과 영국 성공회가 피비린내가 날 정도의 항쟁을 벌이던 중이었다. 메리는 이런 상황에 대해 카톨릭을 신봉하고 성공회의 신도들을 강하게 탄압했다. 이런 행동들에 의해 메리는 '피의 메리(Bloody merry)'라고 불리게 된다. 성공회의 신도들은 메리가 통치하던 영국을 떠나 다른 곳으로 망명하였다가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하자 다시금 돌아오게 된다. 그로 인해서 카톨릭은 북부와 서부, 성공회는 동부와 남부를 중심으로 세력을 떨쳤고, 나라는 종교적인 이유로 두동강이 나버렸다.

 

메리가 통치할 당시 엘리자베스는 여러번 런던탑에 갇혀 죽을뻔 했다. 메리 즉위 후, 반란이 한번 일어나지만 메리에 의해 빠르게 진압되었다. 하지만 반란의 주동자가 엘리자베스 이름을 거론하자 엘리자베스 역시 런던탑에 투옥되었다. 하지만 무고가 밝혀지고 겨우 살아나오게 된다. 그리고 에드워드가 지배할 당시 일어난 반란인 토마스 시모어의 음모에도 가담했다는 혐의로 취조를 받다 풀려나기도 했다. 불우하다면 불우했던 어린시절이 그녀의 조심성 많고 사려깊은 성격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어쨋든 1558년 11월 엘리자베스 1세는 메리가 죽은 후, 의회의 승인하에 영국의 왕으로 즉위했다. 즉위한 그녀는 가장 먼저 종교적인 입장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입장표명, 개혁을 실시했다. 첫째로 영국 성공회를 국교로 지정하면서 로마 교회 혹은 외국으로부터 독립을 표명하였고, 둘째는 왕이 교회의 최고 통치자이며 그 아래에 주교, 사제 등이 위치하는 '주교 제도'의 정립이었다. 이것이 뜻하는 것은 종교가 권력을 가지던 기존의 체계를 무너뜨리고, 왕에게 권력이 집중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초석이었다. 결국 이로 인해 엘리자베스 1세때, 영국의 모든 권력은 왕에게 집중될 수 있는 중앙집권체제의 기초를 닦게 되었다. 단, 성공회가 국교가 된 후, 구 카톨릭에 대한 탄압은 종교적인 차원이 아니라 정치적인 필요에서만 이루어졌다.

 

 

메리 스튜어트, 1542.12.08~1587.02.08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할 당시, 앙리 2세의 며느리로 프랑소와 2세와 함께 프랑스에서 자란 스코틀랜드 여왕이자 프랑스의 왕비였던 '메리 스튜어트'가 엘리자베스의 즉위를 방해했었는데, 이유는 법률상 엘리자베스가 서자의 신분이며 상속권이 없는데, 메리는 정식으로 튜더 왕가의 혈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영국의 왕위 계승권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국 의회는 엘리자베스를 '적자'로 승인하여 더이상 혼란이 없도록 하였는데, 이로 인해 메리는 엘리자베스에게 반감을 갖게 되고, 왕위 계승권에 대한 주장을 굽히지 않고 두사람의 갈등은 심해지기만 했다. 그러다 1568년 드라마처럼 메리 스튜어트가 스코틀랜드 왕위에서 쫓겨나 영국으로 망명해왔다. 엘리자베스는 난감한 사건이었다. 튜더 왕가의 혈통이자, 카톨릭 교도였던 그녀를 처형하게 되면, 다른 카톨릭 국가들과 전쟁을 해야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영국 내에서는 처형해야한다는 의견이 강했다. 하지만 그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못한채 20년 가까이 메리를 감금해 두었다. 하지만 그 동안 메리는 엘리자베스를 암해하려는 계획을 계속해서 시도했고, 결국 엘리자베스는 메리를 처형하고 만다. 이로써 두 사람 간의 불화는 마무리가 되었지만, 주변 카톨릭 국가에는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이 사건을 기회로 삼아 당시 '무적함대'라 불리던 스페인 해군을 영국에 파견한다. 이로써 스페인과 영국간의 전쟁이 시작되는데, 이 전쟁에서 영국 해군의 굉장한 화력, 여기에 폭풍우까지 몰아쳐 스페인의 함대는 거의 괴멸되다시피 한다. 이때부터 스페인의 해군은 점차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고, 영국의 해군은 힘을 얻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전쟁으로 인해 영국 경제는 파산 직전까지 몰렸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의 피나는 노력과 수완 덕분에 어느정도 회복은 할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살았는데, 그 이유는 정치적인 측면, 외교적인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겠다. 우선 엘리자베스 1세에게 관심을 표한 외국의 왕자들도 많이 있었다. 대표적인 사람이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셋째 아들 카를 대공, 스웨덴 화앹자 에릭, 프랑스 왕 카를 9세였다. 하지만 이들 모두는 카톨릭을 옹호하고 지향하는 국가들이었기 때문에, 중립을 받드는 입장에서 카톨릭 국가와 함부로 결혼할 수 없었다. 자칫 국민들의 반발, 왕권의 약화를 초래할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외교적인 문제에서도 언제나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 상황에 따라 이쪽, 저쪽에 도움을 청하고, 기회를 잘 포착하고 이용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이런 기회주의적 행동이 다른 나라의 반감을 사 인접국 모두를 적으로 돌릴수도 있었으나, 이를 잘 해결해낸 것 역시 그녀가 뛰어난 외교적 수완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저는 영국과 결혼했습니다.'

그녀가 남긴 유명한 말이다. '강한 영국'을 유지하기 위해, '절대 왕권'을 수호하기 위해 그녀에게 개인적인 애정을 쏟을 상대, 자신과 나란히 설 수 있는 존재는 필요하지 않았다.

 

1603년 3월 엘리자베스는 숨을 거두게 된다. 그녀의 사후에 후계자를 놓고 말이 많았으나, 엘리자베스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인 제임스가 등극하게 된다. 엘리자베스가 만들어놓은 절대왕정은 이후 정치판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왕위는 제임스 1세, 찰스 1세로 이어지게 되는데, 왕이 모든 권력을 가진 것에 반발한 의회에 의해, 왕과 의회의 갈등이 심화되고, 결국 1642년 의회파와 왕당파의 국내전쟁이 발발하여 1649년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군에 의해 찰스 1세가 처형당하게 된다. 이후 공화정이 들어서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청교도 혁명'이다.

 

엘리자베스 1세 재위 45년동안 잉글랜드는 극빈국에서 유럽 최강국으로 부상했다. 또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며 경외의 대상이 되었으며 종교적 화해까지 이끌어냈다. 물론 실패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후계자가 된 제임스 1세 때 함께 했던 신하들은 종종 '엘리자베스 1세가 다시 함께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업적들이 엘리자베스 1세가 지금도 영국 최고의 여왕 중 한 명으로 불리도록 한 것이다.

 

그녀의 자신감 넘치는 임종 전 마지막 연설은 '황금의 연설'이라 불리게 된다. 그 내용을 마지막으로 글을 줄인다.

 

"단언하건대 나만큼 국민을 사랑하는 군주는 없을 것이다. 신께서 나를 여왕으로 만들어 주신데 감사하지만 내가 누릴 수 있었던 가장 큰 영광은 백성의 사랑을 받으며 통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신께서 나를 왕좌에 앉히셨다는 점보다 이렇게 애정을 보내준 백성의 여왕이 되어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위험에서 구하도록 하셨다는 점이 훨씬 더 기쁘도다. 내가 부여한 권한이 백성들에게 불만이 되고, 특권이 탄압으로 여겨지는 상황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내린 특권을 오용하고 남용했던 자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을것이다. 신께서는 그들을 죄를 내게 묻지 않을 것이다. 왕관은 남이 쓴 모습을 보고 있을 때 영광스러운 법이며 직접 써보면 그다지 즐겁지 않다. 신께서 내게 주신 책무를 이행하고 신의 영광을 드높이며 백성을 안전하게 지켜야 한다는 양심의 명령이 없었다면 나도 이왕관을 누구에게든 주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나는 내가 백성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날까지만 살아서 통치할 생각이다. 나보다 더 강하고 현명한 군주는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지 모르지만 나만큼 백성을 사랑하는 군주는 이제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