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야기 바람.../역사 속 이야기

[피렌체] 메디치 가문에 대한 간략한 정리

[피렌체] 메디치 가문에 대한 간략한 정리

 

토스카나 대공국 국기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가 메디치 은행을 설립하고, 상인 가문이었던 메디치가가 은행으로 사업권을 넓혀놓았다.

그 때, 조반니 디 비치에게는 아들이 둘이 있었는데, 장남이 '국부' 코시모 데 메디치, 차남이 '대' 로렌초 데 메디치 였다.

조반니 디 비치는 자신이 뒤를 이을 후계자로 장남인 '국부' 코시모 데 메디치를 지명하고, 그가 자신의 뒤를 잇게 하였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받은 코시모 데 메디치는 자신의 탁월한 상업능력을 이용하여, 메디치 은행의 저변을 확대하여,

유럽의 각 지방에 메디치 은행의 지점을 설치하였고, 로마 지점은 교황청의 금고 역할을 하여 막대한 자금을 운용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문화, 예술, 학문 등에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르네상스의 부흥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가 메디치 가문을 이끌 당시, 그의 후원을 받은 사람들로 도나텔로, 기베르티, 부르넬레스키가 대표적이다.

코시모 데 메디치의 치세가 어느덧 마무리되고, 그의 뒤를 이어 그의 손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가 뒤를 잇게 된다.

 

로렌초 데 메디치의 치세에 들어 피렌체는 최대의 부흥기를 누리며, 유럽의 경제, 문화 중심지로 발전하였고,

르네상스 황금기의 한가운데 서게 되었다.

그 역시 코시모와 마찬가지로 문화, 예술의 방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으나, 은행 사업에서의 수완은 그다지 좋지 못해,

그가 통치할 당시 메디치 은행 지점의 몇몇곳은 파산을 했고, 나중에 이 일로 경제적인 어려움에 빠지기도 했다.

그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은 대표적인 예술가로는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이 있다.

로렌초는 메디치 가문의 라이벌이었던 '파치 가'에 의해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로렌초의 동생이었던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파치 가'의 공격에 의해 살해당하였다.

이후 로렌초는 '파치 가'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함과 동시에 조카이자 동생 줄리아노의 아들이었던 줄리오 데 메디치를

자신의 아들로 입적시킨다. 줄리오 데 메디치, 바로 이 사람이 교황 '레오 10세'가 된다.

1492년 로렌초 데 메디치가 사망하고 난 후, 피렌체를 유럽의 문화, 경제의 중심지로 부흥시킨 공로가 인정되어

피렌체 시민들에 의해 '위대한 로렌초'라고 불렸다.

 

로렌초의 뒤를 이어 그의 장남이었던 피에로 데 메디치가 수장으로 등극하게 되는데,

피에로 데 메디치는 피렌체 역사상 가장 통치를 못 한 사람으로 회자된다.

피에로 데 메디치가 피렌체를 다스릴 당시, 프랑스의 샤를 8세가 침입하게 되는데, 손도 써보지 못하고 항복을 한다.

이에 반발한 시민들이 1494년 메디치 가문을 피렌체 공화국에서 추방해버리고, 시민들의 손으로 샤를 8세와 맞서게 된다.

 

피에로 데 메디치가 공화국에서 추방당하고 난 후, 메데치 가문은 1512년 피렌체로 다시 한번 복귀하는데,

율리우스 2세 교황의 뒤를 이어 선출된 레오 10세(로렌초의 차남), 그리고 또 다시 그 뒤를 이어 선출된

클레멘스 7세(로렌초의 삼남, 입적시킨 양아들)는 메디치 가문을 다시금 일으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게 두 명의 교황의 노력으로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남은 장자인 알렉산드로 데 메디치를 메디치 가문의 수장으로 앉힌다.

하지만 이 또한 얼마 되지 않아 암살당하였다.

 

알렉산드로 데 메디치의 암살로 '줄리오 디 비치 데 메디치'의 장자계열 '국부' 코시모 데 메디치의 혈통은 끊어지고,

그 뒤를 차자계열 '대'로렌초 데 메디치의 후손인 '코시모 1세 데 메디치'가 잇게 된다.

이로써 메디치 가문의 권력계승이 장자계열에서 차자계열로 옮겨오게 된 것이다.

 

메디치 가문

코시모 1세 데 메디치는 알렉산드로 데 메디치를 암살한 대신들의 요청으로 어쩔 수 없이 옹립되었지만,

이후 군사, 문화, 예술 등 다방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프랑스 군과 연합한 메디치 반대파의 저항을 물리치고,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에게 피렌체에서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지위를 인정받은 코시모 1세는 인접국가인 루카, 시에나 등을 병합하면서

이탈리아의 중부지방인 토스카나 지방을 다스리는 초대 토스카나 대공으로 즉위한다.

코시모 1세는 냉혹하고 독재적인 지배자였으나 그의 치세 하의 피렌체는 작고 보잘것 없던 도시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토스카나 대공국의 수도로 발전하여 엄청나게 성장하게 된다.

또한 다른 메디치 가문의 지배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술과 학문에 대한 후원활동을 계속했다.

그의 후원 아래 가장 강력한 힘을 얻은 이는 화가이자 건축가였던 '바사리'였다.

 

코시모 1세 데 메디치의 뒤를 이어 그의 장남인 프란체스코 1세 데 메디치가 제 2대 토스카나 대공으로 즉위하게 되는데,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페르디난드 1세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는 아버지인 코시모 1세를 닮아 독재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코시모 1세가 피렌체의 자주 통치를 유지했던 반면,

프란체스코 1세는 자신의 장인인 신성로마제국 황제들의 가신처럼 행동했다.

그리고 프란체스코 1세는 제조업과 과학에 대해 아마추어적인 흥미를 보이긴 했으나 그가 죽은 뒤엔 흐지부지 되었다.

프란체스코 1세는 말라리아에 걸려 죽게 되고, 그의 뒤를 이은 사람은 프란체스코 1세의 어린 남동생 '페르디난도 1세 데 메디치'다.

 

3대 토스카나 대공, 페르디난도 1세는 프랑스 앙리 2세의 손녀인 크리스티나와 결혼하여 아홉자녀를 두었다.

그는 메디치 가문과 토스카나 대공국의 마지막 부흥기를 장식한 군주로 그의 사후, 피렌체는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페르디난도 1세 데 메디치의 장남인 '코시모 2세 데 메디치'가 그의 뒤를 이어 4대 토스카나 대공이 된다.

그는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 2세의 딸인 마리아 막달레나와 결혼하여 열덟자녀를 두었고,

학문과 예술에 조예가 깊었으며 이들 분야의 좋은 후원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가 통치할 당시, 과학자인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초빙하여 연구를 지원했고, 아들들의 선생님으로 지정하였으며,

여성 화가인 젠틸레스키의 작품을 구입하는 등 문예부흥운동이 큰 일조를 하였다.

하지만 그는 너무 병약하여 1621년 결핵으로 목숨을 잃는다.

 

그의 아들인 '페르디난도 2세 데 메디치'가 5대 토스카나 대공으로 즉위하게 되는데, 그는 과학 애호가였다.

그는 피렌체의 실험 아카데미를 후원하였고, 이 아카데미는 페르디난도 2세의 동생인 레오폴드가 설립한 것으로

그 둘은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과학에 엄청난 영향을 받은 것이라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는 이탈리아의 7개 도시(피렌체, 밀라노, 볼로냐, 피사 등)에 기상관측소을 설치하여 기상관측망을 확립하였다.

 

그가 죽고, 그의 뒤를 이어 토스카나 대공 가운데 가장 긴 재위기간을 기록한

그의 삼남 '코시모 3세 데 메디치'가 6대 토스카나 대공으로 즉위한다.

페르디난도 3세의 장남과 차남은 모두 죽고, 삼남에게 권력을 물려주었고, 삼남인 코시모 3세는 신학자 반디넬레에 의해 교육받았다.

이런 교육의 영향으로 코시모는 대단히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으며, 종교문제에 적극적이었지만 정치에는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또한 이전의 토스카나 대공들과 달리, 예술과 학문에 대한 열정도 없었으며 오직 폭음폭실을 즐겼고, 호화로운 연회를 즐겼다.

이로 인해 국고가 바닥나기 시작하자, 국민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했고,

그의 치세동안 토스카나 대공국은 본격적인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코시모 3세는 자신의 후계자 문제에 집착하여 자신의 세 자녀에게서 후계자를 얻기 힘들어지자,

자신의 남동생 프란체스코 마리아에게 상속자를 낳아달라고 부탁했으나, 이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후, 코시모 3세는 자신의 딸인 안나 마리아에게 공국을 계승할 수 있도록 노력했으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의 반대에 의해 좌절되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잔 카스토네 데 메디치'가 그의 뒤를 이어 7대 토스카나 대공으로 즉위하는데,

그가 대공의 자리에 취임했을 때는 이미 국고가 바닥나는 등,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리고 잔 카스토네는 정치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고, 아버지 때 정해진 엄격한 법률을 폐지하고, 과세부담을 줄이는 등

대공국을 전대에 비해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통치한다. 이처럼 잔 카스토네는 대공국 통치에 나름대로 분전하였다.

그러나 대공국의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고, 잔 카스토네는 게으르고 술에 빠진채 말년을 보냈다.

결국 1737년 잔 카스토네가 사망하고, 약 400년 간의 이어진 토스카나 대공국의 역사는 마무리 되었다.

토스카나 대공국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로 귀속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