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지왕 존(1167.12.24~1216.10.18)
마그나 카르타는 흔히 대헌장이라고 하는데, 최초로 권리를 문서의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잉글랜드의 땅을 모두 빼앗겨 실지왕(失地王)이라는 별명을 얻은 존이다.
잉글랜드는 헨리 1세와 헨리 2세 시절 비교적 평온했으나, '사자심왕' 리처드 1세의 십자군 원정의 무리한 진행, 사자의 심장은 가졌지만 영혼은 지니지 않았다는 평판 등, 그때부터 평민과 농노들의 생활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리처드가 지방 영주와의 싸움 중 화살을 맞고 사망하자, 헨리 2세의 막내아들인 존이 왕위를 잇는다. 존은 탐욕과 권모술수로 즉위할 때부터 조카 아서를 살해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었다. 당시의 국가적 지위로는 잉글랜드가 프랑스로부터 봉토를 수여받는 형태였는데, 프랑스 왕 필립(필리프 2세)은 아서 살해사건을 프랑스 법정에서 다루기로 결정하고 존에게 소환장을 보냈다. 존이 이에 불응하자 필립은 존을 중죄인으로 간주하고 프랑스 내의 모든 영지를 몰수한다고 공표했다. 그로써 전쟁이 벌어지게 되고 프랑스 내의 잉글랜드 영토를 모두 상실하게 됐고, 그것의 되찾기 위해 무리하게 전비를 마련하고 군대를 징집한다. 또한 켄터베리 대주교를 공석으로 두어 그에 들어온 금액을 횡령하여 당시 교황이었던 이노켄티우스 3세에게 파문당하게 된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선대왕이 소유해왔던 프랑스 내 영토를 모두 빼앗긴 왕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 실지왕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후에는 귀족들이 왕에 대한 충성 포기 선언을 하기에 이르고, 정부의 행정은 거의 마비상태에 빠지게 된다. 결국 1215년 존은 러니미드 초원에서 귀족의 대표들을 만나 원하는대로 따르겠다고 이야기하기에 이르고, 그로 인해 귀족들의 요구를 문서화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마그나 카르타>인 것이다.
마그나 카르타
처음의 내용에는 전제정치를 제한하는 조항이 잡다하게 실려 있었으며, 전체의 일관성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1216년 상당 부분이 삭제, 수정되었다. 현행법으로 확인되어 지는 것은 1225년에 약간의 개정을 거쳐 재발행 된 것이다.
마그나 카르타의 내용은 굉장히 방대한데, 미성년자의 상속세와 후견인 제도, 과부의 재혼에 필요한 동의 그리고 지참금 회복 문제 등을 포함하여 63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봉건제도의 특수한 관계와 지위를 모르고서는 그 상세한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대부분의 조항이 귀족들의 이해관계와 관계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 예로 제 1조에서 잉글랜드 자유의 불가침성을 확인하고 모든 자유민이 그것을 향유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그 자유는 절대왕권에 대한 귀족의 자유에 한정되는 것이다. 또한 국왕이 봉건 계약상 결정되지 않은 세금을 징수하려면 반드시 귀족으로 구성된 대자문 회의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조항도 농민들의 이해관계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인권 선언으로써 의미를 부여할 만한 것으로는 제 39조 조항이 있다.
"자유민은 같은 신분의 사람들에 의한 적법한 판결이나 법의 정당한 절차에 의하지 않고서는 체포되거나 구금되지 아니하며, 재산과 법익을 박탈당하지 아니하고, 추방되지 아니하며, 또한 기타 방법으로 침해당하지 아니한다. 왕은 이에 뜻을 두지 아니하며, 이를 명하지도 아니한다."
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이 조항도 따지고 보면 자유민의 권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왕권제한을 통해 귀족 세력의 확대를 위한 것일 뿐이다. 또한 그 당시의 자유민의 의미는 지금과 다르다. 당시의 자유민이란 그 아래의 비자유민을 전제로 한 하나의 계급으로 볼 수 있다. 형식적인 면에서도 마그나 카르타는 모든 자유민을 주체로 한 권리 선언이 아니라, 국왕이 행한 서약에 불과하다.
결과적으로 이 문서는 봉건 체제의 문서이지 근대적 의미의 인권 보장을 목적으로 한 권리 장전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 이전의 시기를 고려할 때, 마그나 카르타의 의미를 '자유의 상징'이라 받아들일 만한 측면이 있다. 그 실질적 의미는 노르만 시대 전제군주제의 종말을 시사했다는 데 있다.
이 문서가 영국 입헌정치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17세기에 의회 세력이 스튜어트 왕조의 절대왕정과 전면적으로 대결하여 혁명에까지 이른 과정에서 에드워드 쿡(Edward Coke)을 중심으로 한 반 국왕파 그룹이 대항의 논리를 마그나 카르타를 기반으로 요구한 것에서 시작된다. 그를 통해 훗날 자유와 권리의 내용이 확장되었고, 그 대상이 국가의 모든 구성원에게까지 확대되었다. 그래서 마그나 카르타는 권리청원, 권리장전과 함께 영국 근대 입헌정치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입헌군주국가 성립 이후 현재까지 영국 헌법의 일부로 그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1215년 기록된 마그나 카르타의 원본은 초 4가지가 현존하는데, 2가지는 영국 링컨에 위치한 링컨 대성당, 잉글랜드 남부 솔즈버리에 위치한 솔즈버리 대성당에 있고, 나머지 두가지는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216년, 1217년, 1225년 개정된 것은 더럼 지역에 위치한 더럼 대성당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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