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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고대 로마 이야기 #.4-3 기독교를 공인한 로마의 새로운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上)

[로마] 고대 로마 이야기 #.4-3 기독교를 공인한 로마의 새로운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上)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당시까지 내려오던 전통 종교를 대신하여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공인하고 콘스탄티노플을 새로운 제국의 중심지로 만들어냈다. 이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이전과는 다른 로마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그 어떤 인물보다도 서양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지금부터 그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콘스탄티누스 대제

 

 

콘스탄티누스는 272년에 태어났다. 당시 로마는 '5현제'로 대표되는 제국의 최전성기를 지나 군인황제들이 여기저기서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안으로 굉장히 혼란스러웠고, 밖으로는 페르시아의 침입으로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3세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나타나면서 이러한 상황들이 어느정도 정리가 되었다. 이때 제국의 영토가 너무나도 커져있는 상태라 외적의 침입도 잦았을 뿐만 아니라, 이를 방어하는데도 어려움을 겪게 되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좀 더 효과적으로 제국을 방어하고 통치하기 위해 제국을 4개로 분리하기로 결정한다.

 

이탈리아, 일리리아, 갈리아, 에스파냐, 북아프리카를 서로마로,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 이집트를 동로마로 나누고, 동,서로마를 각각 다른 황제가 통치하게 되었고, 그 아래 부제(副帝, Caesar)를 두면서, 두명의 정제(正帝, Augustus)와 두명의 부제, 총 4명의 황제가 제국을 분리 통치하게 된 것이다. 이를 사두정치라 하는데, 처음에는 사두정치가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다. 페르시아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아르메니아를 되찾았고,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들을 평정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분명한 위험성이 존재했다. 황제가 4명이다보다 그들 중 누군가가 다른 황제의 권력을 탐낸다거나, 황제끼리 싸움이라도 일어난다면 로마제국의 분열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4세기 로마제국 분열도

 

 

콘스탄티누스는 당시 서로마의 부제를 지내던 콘스탄티우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사두정치의 위험성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콘스탄티누스를 인질 아닌 인질로 잡아두었다. 당시 콘스탄티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를 옆에서 따르며 많은 것을 배웠다. 하지만 종교적인 측면만은 이해하지를 못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기독교를 박해한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전통 종교와 마찬가지로 기독교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인 헬레나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것, 거기에 로마의 상황이 로마의 전통종교를 믿던 귀족들과 군인들, 학자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기 시작한 시기였다는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어쨋든 305년 서로마의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동로마의 정제 막시미아누스는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고 물러나게 되는데, 이때 부제였던 콘스탄티우스와 갈레리우스가 정제로 올라서게 되었다. 당시 동로마 갈레리우스 황제의 처소에 머물던 콘스탄티누스는 권력싸움에 휘말리게 될까 걱정하여 아버지인 콘스탄티우스가 있는 서로마로 도망친다.

 

아버지의 곁으로 돌아온 콘스탄티누스는 픽트족을 정벌하기 위해 브리타니아로 원정을 떠나는데, 그곳에서 콘스탄티우스가 병에 걸려 사망하게 된다. 콘스탄티누스가 돌아온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306년의 일이다. 여기서 콘스탄티우스를 따른 군대가 그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를 황제로 선언하고, 그를 서로마의 정제로 옹립하려 하지만 동로마의 황제였던 갈레리우스가 이를 인정하지 않아 이루어 지지는 않았다. 갈레리우스는 세베루스를 서로마의 정제로 삼고, 콘스탄티누스를 부제로 삼았다. 콘스탄티누스는 이에 반발하지 않고 부제가 되어 갈리아와 브리타니아를 다스리며 명성을 쌓았다.

 

 

밀비안 다리의 전투, 바티칸 박물관

 

이때 동로마는 위기를 겪게 되는데, 디오클레티아누스와 함께 권력에서 물러났던 막시미아누스가 아들인 막센티우스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갈레리우스는 그들과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전투는 길어졌고 결국 308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중재하여 막시미아누스와 갈레리우스가 모두 권력에서 물러나고 막시미아누스의 친구 리키니우스를 정제로 임명하게 하였다. 하지만 막시미아누스의 아들인 막센티우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 지역을 지배했다. 막시미아누스는 콘스탄티누스에 의탁했다가 310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새로운 동로마의 황제가 된 리키니우스도 부제인 막시미누스 다이아와 권력다툼을 시작하며서 사두정치의 위험성이 현실이 되었다. 이런 혼란한 정세 속에서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와 동맹을 맺고 막센티우스를 공격하기 위해 로마로 향한다.

 

콘스탄티누스는 알프스를 넘어 로마로 진격했고, 점령한 도시에서 일체의 약탈을 금지하여 민심을 얻으며 진군해나갔다. 312년 10월, 밀비안 다리를 경계로 두고 막센티우스와 콘스탄티누스 간의 결전이 벌어진다. 이 전투에서 콘스탄티누스는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콘스탄티누스를 모시던 가신이 이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갑옷과 방패에 십자가 표시를 하라고 한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는 믿지 않았고, 밀비안 다리를 건너 막센티우스를 공격하려 하자 하늘에서 유성이 그의 부대 앞에 떨어져 그 피어오르는 연기가 십자가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에 콘스탄티누스는 이것을 하늘의 계시라 여기고 병사들의 갑옷과 방패에 십자가를 형상화한 문양을 그려넣었고 밀비안 다리를 건너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본인만 알고 있을 것이다.

 

이때 막센티우스는 콘스탄티누스를 제거하기 위해 밀비안 다리의 연결부분을 허술하게 만들어 그가 건너올 때 다리를 무너뜨리려는 계략을 세웠다. 하지만 일련의 일들을 겪은 콘스탄티누스는 다리를 건너지 않고 건너편에서 기다리고만 있었다. 당시 군대의 규모는 막센티우스가 1.5~2배 정도로 많았음에도 먼저 공격하지는 않았다.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막센티우스는 다리 건너편에서 기다리고 있는 콘스탄티누스를 도발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지만 아무런 동요가 없자, 군사들에게 다리 위를 왔다갔다하며 약을 올리라 명하고 콘스탄티누스의 진군을 기다렸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가 쉽게 걸려들지 않자 급해진 막센티우스는 직접 밀비안 다리에 올라가 호통을 치는데, 바로 이때 다리가 무너져 버렸다. 이에 무거운 갑옷을 입고 있던 막센티우스는 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익사하게 되었다. 우두머리를 잃은 막센티우스의 군대는 우왕좌왕했고, 이제야 콘스탄티누스는 그들을 공격하였다. 이렇게 밀비안 다리에서 대승을 거둔 콘스탄티누스는 서로마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