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왕후였던 자유로운 영혼, 시시
엘리자베스 아멜리에 유진(Elisabeth amelie eugenie, 1837~1898), 애칭 시시
지금 이야기 하고자 하는 엘리자베스는 1837년 바바리아, 현재로 보면 독일 바이에른 지방의 공작이었던 막시밀리안 요세프와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케롤라인(바바리아의 공작녀 루도비카, 사촌지간) 사이에서 태어납니다. 넷째로 태어난 엘리자베스는 그녀보다 3살이 많은 언니 헬렌과 달리 자유분방하고 외향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당시 아이들을 자유롭게 뛰어놀게 하면서 키우는 풍습에도 영향을 받았겠지만 아버지인 막시밀리안 요세프의 외향적 성격도 큰 영향을 끼친 듯 보입니다.
엘리자베스가 16살이 되던 해, 어머니인 루도비카 공작녀는 자신의 자매인 오스트리아의 소피에게서 편지를 하나 받게 됩니다. 편지의 내용인즉슨 자신의 아들이자 오스트리아의 황제인 프란츠 요세프를 얌전하고 조신한 셋째 딸 헬렌과 결혼시키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해서 루도비카 공작녀는 헬렌을 오스트리아로 보내는데 이때 넷째 딸인 엘리자베스도 함께 보냅니다. 이 기회에 엘리자베스도 오스트리아의 왕족과 결혼시킬 생각을 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희한하게도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요세프는 정작 헬렌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고, 동생인 엘리자베스에게 빠지게 됩니다. 결국에는 1854년 프란츠 요세프는 헬렌이 아닌 엘리자베스와 결혼을 하게 되고, 엘리자베스는 오스트리아의 황후에 오르게 됩니다. 언니인 헬렌은 나중에 또 다른 왕가의 인물과 결혼해서 굉장히 잘 살았다고 합니다. 어쨌든 엘리자베스의 수난은 지금부터 시작이 됩니다.
황제 프란츠 요세프의 어머니였던 소피는 얌전하고 조신했던 헬렌과 달리 감정적이고 낭만을 좋아하고, 한편으로는 말괄량이 끼가 다분한 엘리자베스를 탐탁치 않게 여겼습니다. 자유로운 영혼, 엘리자베스는 소피의 감독 하에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딱딱한 궁정예절을 배웠고, 왕가의 엄격한 규율을 지켜야 했습니다. 서로 맞지 않았던거지요. 그에 적응하지 못했던 엘리자베스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는 결혼 10개월 만에 첫 번째 딸인 소피를 출산하게 되는데, 갓 태어난 첫째 딸인 소피를 시어머니 소피가 반강제로 데려가 키우게 되는데, 여기서 더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게 되죠. 여기서 그친 것이 아니라 둘째 딸인 기셀라가 태어났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참지 못한 엘리자베스가 양육권을 강력히 주장하여 소피에게서 두 딸을 데려와 직접 키우게 되는데, 직접 키운지 얼마 되지 않아 첫째 딸인 소피가 2살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후부터 엘리자베스는 양육권 주장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되었고, 자책감에 빠져 지내게 됩니다. 그런 와중에 셋째인 루돌프가 태어나게 됩니다. 유일한 아들이자 프란츠 요세프의 왕위계승자였죠.
엘리자베스는 첫째 딸 소피가 죽은 일이 굉장한 충격으로 다가왔고, 또 다른 스트레스가 되어 지금까지 쌓여왔던 스트레스들과 함께 폭발하게 됩니다. 어린 나이에 합스부르크에 시집을 와서 확실한 자아를 형성하지 못했던 당시부터 시어머니 소피의 엄청난 압박으로 인해 쌓였던 것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폭발한 스트레스는 엉뚱한 곳으로 튀어 자신의 외모관리에 온 힘을 쏟게 됩니다. 상황이 그렇게 만든 것일 수도 있는데, 엘리자베스는 정치가로서의 힘, 어머니로서의 힘, 황후로서의 힘은 소피에 의해 극도로 억눌려있는 상태였고, 사람들은 엘리자베스의 미모를 칭송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자베스는 172cm의 큰 키에 50kg의 몸무게를 죽을 때까지 유지했다고 합니다. 아이를 네 명이나 낳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대단하죠. 약간의 거식증의 증상도 있었다고 합니다만 조금은 심한 수준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허리가 16인치였다고 하니까요...그 뿐만 아니라 매일같이 승마, 등산, 펜싱 등과 같은 운동을 하였다고도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가꾼 자신의 외모, 몸매를 보여주기 위해 그 당시 유행하던 커다랗고 풍만한 치마를 버리고 심플하면서도 라인을 보여줄 수 있는 드레스를 입었다고 합니다. 외모에 대한 그녀의 집착이 어느 정도인지는 대충 상상이 가시나요? 그리고 그녀가 했던 또 하나는 여행입니다.
엘리자베스는 궁에만 들어오면 고통을 호소했다고 합니다. 매일같이 두통을 호소하거나, 구토를 한다거나 이런 식으로 말이죠. 이런 증상들은 실제로 몸이 아팠다고 하기보다 심리적인 요소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궁 안에서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이런 증상까지 보일까를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남편 프란츠 요세프는 왜 그렇게까지 어머니인 소피에게 한마디 해주지 못했을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어쨌든 엘리자베스는 그런 현상이 반복되자 왕궁이 아닌 밖으로 다니기 시작합니다. 세 번째로 낳은 루돌프 역시 시어머니에게 뺏기다시피 하였기 때문에, 막내 딸인 발레리와 함께 여행을 다니게 되죠. 계속해서 전 세계를 여행 다니는 엘리자베스에게 황제는 계속해서 사랑의 편지를 써서 애정을 표현했지만, 그녀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여행을 다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을 너무나도 환영해주는 헝가리에 큰 애정을 품게 되는데, 나중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가 헝가리의 왕권을 얻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또 다시 비극이 닥치게 되는데, 바로 아들인 루돌프의 권총 자살입니다. 헝가리의 왕위계승권을 물려주려고 했던 루돌프가 자신의 애인과 함께 자살을 하게 되자, 헝가리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에 후계자가 사라져버리게 되고, 프란츠 요세프 황제의 동생인 칼 루드비히가 왕권을 계승하게 됩니다. 또한 그 후계자로 자신의 아들인 프란츠 페르디난드를 임명합니다. 여기서 나오는 또 하나의 이야기, 바로 칼 루드비히의 아들인 프란츠 페르디난드가 사라예보에서 공개적으로 암살당하면서 1차 세계대전의 서막이 열리게 되는거죠. 이후 러시아의 차르가 살해되는 사건이 발발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러시아 사회혁명을 초래했고 왕족들이나 기득권 층이 위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아들인 루돌프의 죽음 이후, 언니인 헬렌의 죽음과 어머니 루도비카 공작녀의 죽음까지 이어지면서 엘리자베스는 더욱 더 밖으로 다니게 됩니다. 그렇게 아들의 죽음 이후 9년을 떠돌아 다니던 엘리자베스는 러시아 사회혁명이 발발하자 안전을 위해 스위스의 제네바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호텔을 나선 엘리자베스는 1898년 12월 무정부주의자의 칼에 찔려 살해당하게 됩니다. 엘리자베스는 이후 오스트리아 빈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왕족들이 묻힌 묘지에 안장됩니다.
엘리자베스 아멜리아 유진, 애칭 시시. 안타깝고 애처로운 삶을 살아온 한명의 여인으로 다가갈수도 있고, 이런 많은 어려움 사이에서 본인의 자유로운 성향과 감성적인 것을 죽을 때까지 여행을 통해 발산하며 죽은 이 사람이야 말로, 형식에 얽매이고, 규율에 사로잡혀 있던 당시 다른 왕족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한다. 어떠한 틀에 갇혀있는 현대인들에게도 충분히 그런 충격을 줄 수 있는 그런 인물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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