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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현재까지 존경받는 종교개혁가, 얀 후스

 

얀 후스

[체코] 현재까지 존경받는 종교개혁가, 얀 후스

루터 이전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

1520
년 루터가 가톨릭 교회로부터 ‘파문’의 위협에 직면해 있을 때 루터를 지지하던 독일 사람들은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았다. 그들은 꼭 100 년전 보헤미아 지역에서 일어났던 불행한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교회개혁의 기치를 내걸었던 얀 후스가 화형(火刑)을 당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일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얀 후스(Jan Hus)는 오늘날 ‘체코공화국’의 보헤미아 지역 출신이었다(1993년 체코슬로바키아는 ‘체코공화국’과 ‘슬로바키아’ 두 나라로 분리됐다). 보헤미아는 우리에게 조금 생소하게 들리지만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는 교향곡 ‘신세계’를 작곡한 안톤 드보르작도 보헤미아 출신이다.

후스는 1372년께 보헤미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그는 그 지역의 최고 명문 프라하 대학에서 수학했다. 이 대학은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황제가 세운 대학이었고 따라서 ‘카를 대학’이라고도 불린다. 당시 프라하 대학은 유럽 굴지의 대학이었고 프라하를 중부 유럽의 학문과 문화의 중심도시로 만들었다.

프라하 대학에서 신학공부를 마친 얀 후스는 그 대학에서 교수가 되었고 약관 29세에 철학부의 학장이 되었다. 이는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으나 후스는 그만큼 인정 받았던 출중한 학자였다. 그가 37세가 되었을 때 프라하 대학의 총장이 되었다. 학자로서는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또한 1400년부터 가톨릭 사제로도 활동을 했다.

후스 생애의 큰 전환점은 그가 존 위클리프의 글을 접하게 된 것이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명성을 떨치던 교수였던 위클리프는 당시 중세 가톨릭교회의 잘못된 점,고쳐야 할 점을 지적하는 많은 글들을 썼다. 그는 종교개혁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위클리프의 글을 읽고 후스는 깊은 감명을 받아 그의 글들을 체코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후스는 당시 중세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의 모습과는 큰 거리가 있다는 위클리프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후스의 사상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진리의 추구’였다. 그는 이렇게 역설했다.

크리스천들이여! 진리를 찾으라. 진리에 귀를 기울여라. 진리를 배우라. 진리를 사랑하라. 진리를 말하고,죽음을 두려워말고,진리를 사수하라.”

또한, "진리는 교황의 입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성경속에 있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 하여 교황에게 파면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에게 진리의 근원과 진리의 표준은 성경 말씀이었다.

그는 당시 교회의 도덕적 해이를 책망했고 교황이 갖고 있던 교황권은 성경에서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탁월한 신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명설교가였다. 보헤미아 지역에서 그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로마교황청의 심기는 더욱 불편해졌고 그의 입을 막을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1414년 가톨릭교회의 종교회의가 독일 남단에 위치한 콘스탄츠에서 개최되었다. 후스는 이 종교회의에 참석,자기의 입장을 알리고 교회개혁을 설득하기로 마음 먹었다. 독일 황제로부터 신변 안전을 보장받은 그는 콘스탄츠를 향해 길을 떠났다.

그러나 콘스탄츠에 도착한 후스는 즉시 체포돼 투옥되고 말았다. 그는 당대 명문대학 총장이었고 최고 지성인이요 유럽의 유명인사였다. 그러나 가톨릭교회에서 볼 때 그는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단자’였고 ‘이단자’에게는 관용이 허락되지 않았다. 후스는 투옥된 상태에서 그의 모든 주장을 철회하라고 강요 당했다. 그러나 그는 콘스탄츠 종교회의가 성경 말씀에 근거해서 그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지적해주지 않는 한 생각을 바꿀 수 없다고 맞섰다.

독일 황제가 중재에 나섰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결국 14157월 6일 당시 로마교회는 후스를 ‘이단자’로 정죄하고 화형에 처하고 말았다. 그가 화형에 처해졌다는 소식이 보헤미아 지역에 전해지자 국민들의 충격과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프라하 대학은 총장의 죽음을 ‘순교자’의 죽음으로 선포했고 그는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오늘날도 후스는 체코인들이 가장 추앙하는 역사적 인물이며 “주님의 진리가 승리하리라!”고 하는 그의 삶의 모토는 현재 체코 공화국의 모토로 채택되었다. 현재까지 후스가 화형당했던 1415년 7월 6일은 체코의 국경일로 지정하여 그를 기리고 있다.

그의 화형 이후, 후스를 따르던 추종자들이 후스파를 결성하였고, 체코 구시가의 틴성당을 본거지로 하여 지속적으로 종교개혁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교회에 발각되어 모두 숙청당했고, 가톨릭은 그들이 성스럽게 여기던 황금성배를 녹여 성모마리아 상을 만들어 틴성당의 상부에 붙여놓음으로써 가톨릭 교회의 위상을 높이고 본보기로 삼는데 이용하였다.

후스는 루터보다 100년 앞선 종교개혁가였다. 그런데 후스의 최후에 관해서 한 가지 흥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화형대에서 뜨거운 불길이 후스의 몸을 삼키려 할 때 그는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나는 이제 ‘거위’와 같이 불에 타 죽지만 앞으로 ‘백조’와 같은 인물이 내 뒤를 이으리라.”

마르틴 루터가 역사의 무대에 출현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100년전 후스가 말했던 ‘백조’가 드디어 나타났다고 믿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루터를 ‘백조’로 표현했다. 그러나 ‘백조’를 바라보는 당시 독일 사람들의 시선은 불안하기만 했다. 후스가 당했던 운명을 루터가 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