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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제(女帝) 마리아 테레지아
18세기 자타공인 유럽 최대의 왕조인 합스부르크가의 유일한 상속자였지만 여성은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다고 정한 살리카 법(프랑크왕국 때 만들어진 법)으로 인해 황후라는 이름에 만족해야 했던 마리아 테레지아. 그러나 그녀는 명칭이나 직함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 것은 확실히 지켜내는 강인한 여인이었다. 비록 황후의 자리에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자신의 영토를 훌륭하게 다스린 여제로서 가장 18세기다운 통치자였다.
유럽의 최대 왕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유일한 상속녀
18세기 유럽왕실은 프랑스의 부르봉 가문과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양분하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16세기 카를 5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올라 에스파니아 지역까지 차지하면서 유럽 최대의 왕실가문으로 부상하였던 합스부르크가는 18세기까지 직계와 방계가 모두 유럽왕실의 주축으로 건재하였다. 합스부르크가는 10세기경 스위스 북부의 작은 지역 소 영주에서 시작하여 11세기 합스부르크(매의 성이라는 뜻) 성을 쌓은 뒤부터 가문의 이름을 합스부르크라고 하였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유럽 왕실의 중앙 무대로 데뷔하게 된 것은 독일지역 제후들의 갈등 속에서 13세기 루돌프 1세가 어부지리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자리를 얻으면서부터였다. 신성로마제국의 제위는 이 무렵 금인칙서를 통해 7명의 선제후가 황제를 선출하게 되어 있었는데 힘이 강한 제후들이 서로를 견제하는 가운데 가장 약체였던 합스부르크 가문에 황제의 자리가 돌아갔다.
독일의 여타 제후들은 합스부르크가의 루돌프 1세를 얕보고 그를 황제자리에 앉혔지만 그는 대단한 야심가였다. 루돌프 1세는 정략결혼으로 오스트리아를 획득하였으며 이후 합스부르크가는 때로는 전쟁으로 때로는 혼인관계를 통해 가문의 영토를 착실히 넓혀갔다. 그 결과 15세기에 이르러 합스부르크가는 오스트리아와 독일 일부, 헝가리, 뵈멘 등을 폭넓게 차지한 유럽명문가의 하나로 부상하였다. 합스부르크가는 16세기 혼인정책이 성공하면서 최대의 전성기를 맞았다. 합스부르크 가문과 에스파니아 왕실의 통혼으로 카를 5세 때 유럽 대륙에서 프랑스 및 일부 지역을 제외한 유럽 대륙이 거의 합스부르크가의 영토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카를 5세 이후 합스부르크가는 신성로마제국의 제위를 보유하는 오스트리아계와 에스파니아를 통치하는 방계 합스부르크가로 분열되었지만 18세기 초반, 프랑스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유럽 대륙은 합스부르크가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가의 유일한 상속녀였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오빠가 어린 나이에 요절한 이후, 그녀의 아버지 카를 6세에게는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차기 제위의 후계자에 대한 관심으로 유럽왕실은 달아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의 유럽왕실은 어떤 식으로든 합스부르크가와 친척으로 관련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라도 이 탐나는 자리의 상속권자로 이름을 올리고 싶어했다. 여자는 신성 로마 제국을 다스릴 수 없었고, 게다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 가운데 일부는 살리카법에 의해 남자만 상속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카를 6세는 자신이 죽은 뒤 합스부르크가의 영토가 분할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는 국사 조칙(프라그마티셰 장크치온 Pragmatische Sanktion)을 발표하고 살아 생전 모든 외교적 수단을 이용하여 마리아 테레지아의 오스트리아•보헤미아• 모라바• 헝가리 등 합스부르크 왕가 세습령의 상속을 여타 제후와 국가들로부터 인정받으려고 하였다. 여성이 제위에 오를 수 없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에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 로트링겐 공 프란츠 슈테판이 오르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이로서 마리아 테레지아는 신성로마제국의 황후이면서 합스부르크 가문 영토의 소유권을 그대로 물려받아 오스트리아의 여대공,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여왕 겸 보헤미아의 여왕, 파르마 여공이 되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그러나 막상 카를 6세 사후 마리아 테레지아가 합스부르크 가를 상속받게 되자 주변 나라들은 그녀의 상속권에 일제히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합스부르크와 친척관계를 맺고 있던 유럽의 왕실들은 서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상속권을 주장하며 영토를 분할하려고 오스트리아를 침공했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1748)이 시작된 것이다. 이 전쟁은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 사실상 유럽의 모든 나라가 개입된 전쟁이라고 할수 있었다. 합스부르크가문의 친척으로 상속권을 가진 나라는 나라대로, 상속권이 없다고 할지라도 합스부르크가의 변화가 유럽의 세력판도에 미칠 영향에 민감한 나라는 나라대로 이 전쟁에 어떤 식으로든 관련되었다. 전쟁의 시작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슐레지엔 땅의 계승권을 주장하면서 부터 시작되었다. 한때 마리아 테레지아의 결혼상대로 물망에 오르기도 했던 프리드리히 2세는 카를 6세의 국사 조칙을 파기하고 선전포고도 없이 1740년 슐리지엔을 공격하였다. 잘 훈련된 프로이센 군대에 맞서 오스트리아는 고전을 거듭하다 결국 슐레지엔을 잃게 되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를 입는다.
설상가상으로 바이에른의 제후 카를 알베르트도 프란츠 슈테판의 신성로마제국 황제계승에 반대하며 자신의 계승권 주장하고 나섰다. 바이에른의 제후는 프랑스와 손을 잡고 오스트리아를 침공했다. 잇따른 전쟁으로 인해 오스트리아는 빈사상태에 이르렀고 합스부르크의 해체는 머지 않아보였다.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신에게 닥친 위기에 굴복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다스리는 헝가리 의회로부터 지지를 받아내어 전비를 마련하고 프랑스와 적대적이던 영국과 손을 잡아 전세를 역전시켰다. 한때 바이에른의 제후 카를 알브레히트(신성로마제국 카를 7세)에게 빼앗겼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자리도 탈환하여 남편 프란츠 슈테판을 다시 제위에 앉히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오랜 전쟁으로 지친 유럽 각국의 이권문제와 국가 간의 적대적인 관계 등을 고려한 모든 외교적 수단을 이용하여 1748년 아헨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아버지 카를 6세 때 확인한 자신의 상속권을 모든 유럽국가로부터 승인받기에 이르렀다.
잃어버린 슐레지엔은 이후 7년 전쟁을 통해 다시 회복하려 노력하였다. 이때 마리아 테레지아는 과거 전쟁 상대였던 프랑스와 과감히 손을 잡고 엘리자베타 여왕이 다스리던 러시아를 끌어들여 반 프로이센 전선을 구축하기도 하였다. 이를 프랑스의 퐁파두르부인-합스부르크의 마리아 테레지아-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왕, 세 명의 여인 연대라 하여 ‘3자매의 패티코트 작전’이라고 하기도 한다. 비록 당시 외교적 상황과 강력한 프로이센 군대의 대항으로 결국 슐레지엔 땅은 되찾지 못했지만, 왕위계승 전쟁과 7년 전쟁에 이르기까지 마리아 테레지아가 보여준 강인한 의지와 노련한 외교술은 나약한 여성이 아니라 한명의 뛰어난 통치자로서 그녀의 능력을 분명히 입증하는 것이었다.
가정에서는 순종적 아내, 정치에서는 뛰어난 통치자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 프란츠 스테판은 로트링겐(현재 프랑스 로렌지역)의 공작으로 당시 유럽에서 가장 미남자로 알려져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또한 전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미모를 가진 공주로 널리 알려져 사람들로부터 인기가 많았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빈으로 유학 온 프란츠 슈테판과 열렬한 연애 끝에 19살에 결혼하였다. 이 선남선녀의 결합은 약간의 정략적 이유가 가미되기는 했으나 오로지 정략만으로 결혼을 하던 유럽왕실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훈훈한 결혼담이었다. 프란츠 슈테판은 밝고 친화력이 있는 성격으로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 카를 6세도 썩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한다.
마리아 테레지아와의 결혼으로 유럽최대 왕실의 사위가 된 프란츠 스테판은 자신의 영지 로트링겐을 포기하는 대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지위를 얻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닌 것 같으나 프란츠 스테판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사위가 된 이후 정치적인 부분에는 거의 나서지 않았다. 명예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에 있으면서 그는 정치 대신 자신이 좋아하는 자연과학 연구에 몰두하였으며 건축, 예술, 문화면에서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쉔브룬 궁전 안에 식물원과 동물원을 만들고 정원을 꾸몄으며, 곤충이나 광석을 분류한 콜렉션을 만들기도 하였다. 실제적인 정치는 모두 마리아 테레지아의 몫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 카를 6세는 마지막 순간까지 남자 후계자가 태어날 것을 바란 탓에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군주의 교육은 거의 하지 않고 여성의 덕목만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러나 오랜 세월 유럽왕실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합스부르크가의 사람답게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신에게 온 권력을 버거워하지 않았다. 마치 오랫동안 준비해온 사람처럼 한 사람의 온전한 통치자로서 자신의 영토를 다스려가기 시작했다. 특히 외교적 수완이 뛰어 났으며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내정에도 상당한 성과를 이루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슈테판은 결혼 후 유별난 금슬을 자랑하기도 하였다. 이 부부는 슬하에 16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어린 시절 사망하지 않고 어른으로 성장한 자녀는 10명으로 대부분 합스부르크가의 목표인 영토 확장을 위해 정략결혼을 하였다. 그 중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는 200여 년간 적대적이던 프랑스와의 관계회복을 위해 퐁파두르 부인의 주선으로 프랑스의 루이 16세와 정략 결혼하였다.
유럽 어느 나라의 황제보다 더 유능하고 힘 있는 군주였지만 막상 가정으로 돌아오면 마리아 테레지아는 더할 나위 없이 순종적인 아내의 역할을 자처하였다. 정치에서 소외되고 있는 남편 프란츠 슈테판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며 가정의 화목을 이끌어 나간 것이다. 실제로 마리아 테레지아는 평생을 두고 남편을 대단히 사랑하였고 프란츠 슈테판이 사망한 후 자신이 죽을 때까지 16년간 상복을 벗지 않고 그를 애도했다고 한다.
완벽한 18세기적 통치자
일련의 전쟁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랜 전쟁으로 약해진 자신의 통치 지역을 다시금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 내치에 힘썼다. 당시 18세기 유럽은 새로운 사상으로 들끓고 있었다. 계몽주의 사상이 대히트를 친 것이다. 계몽주의 사상은 인간의 이성에 의해 의식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사상으로 유럽각국의 혁명과 개혁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으며 마침내 18세기 말 프랑스혁명을 이끌어 내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사상가로서는 볼테르, 몽테스키외, 루소 등이 있다. 18세기 왕들은 이러한 계몽주의 사상의 세례를 받고 새로운 왕권을 시도해보기 시작하였다. 이전까지 잔혹하고 절대적이던 왕의 이미지를 벗고 계몽주의자의 입장에서 무지 몽매한 백성을 이끌어 나라의 부강까지 이룬다는 이른바 계몽군주의 단꿈에 젖어 있었던 것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또한 이러한 계몽사상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내정을 대폭 재정비하여 가혹한 농민 착취를 금하는 법을 만들고, 요즘으로 말하면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교육제도를 마련하여 국민 의무 교육제를 실시하였다. 군사적인 면에서는 군사 행정 위원을 설치하여 군세 징수 등에 관한 외부의 개입을 배제시켰다. 또 일반 징병제를 채용하여 전 국민의 병역을 의무화하였는데, 이 병역의 의무화는 농민출신 병사들에게도 평등하게 급료를 주는 제도였다. 이로써 병사들은 안정된 생활이 가능하게 되었고 오스트리아의 군사력은 현격하게 증강되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마리아 테레지아는 온건한 18세기적인 사고에 젖어 있는 군주였다. 이전의 절대적인 왕권에 대한 향수는 여전하였고 민족을 중심으로 한 국가보다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하는 영토적인 국가 개념에 더 연연했다.
급진적인 계몽 사상에 일말의 거부감마저 품고 있던 그녀는 계몽사상에 심취해 있던 아들 요제프 2세의 행동을 매우 경계하였다. 요제프 2세는 아버지 프란츠 슈테판이 죽은 이후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와 함께 합스부르크가의 영토를 공동으로 통치하였다. 계몽주의 사상에 심취하였던 그는 ‘계몽주의 전제군주'의 모습을 지향하였지만,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제약으로 그 뜻을 크게 펴지 못하였다. 요제프 2세의 급진적 개혁은 마리아 테레지아 사후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지위를 결코 모래처럼 흘려버리지 않고 단단히 움켜쥔 여성이었다. 그녀의 정치사상은 어느 정도는 시대적인 한계성을 품고 있었지만, 이 또한 서두름을 경계한 탓에 혁명의 기운이 감돌던 시절, 그나마 오랫동안 합스부르크 왕가의 왕권 안정을 이루어 내는 바탕이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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